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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Jul 19. 2021

고전은 읽지 않는 것보다 읽는 게 낫다

고전은 왜 읽는가? 왜 읽어야 하는가?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모두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콩나물은 자란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너도나도 인문학이니 고전이니 말을 한다. 《논어》를 말하거나 공자를 입에 올린다. 인문학도 고전도 말만 한다고 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고전을 대하는 마음가짐부터 바뀌어야 한다. 고전을 팔아 책을 내어 독자를 현혹하는 일련의 저자에게 현혹되어 실상 그들이 말하는 고전은 읽지 않고 덧붙인 해설만으로 고전을 읽지 않은 것을 위안받으려는 일반 독자가 태반이다.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이 고전이라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르반테스가 고전에 내린 정의를 자기 말처럼 즐겨 인용한다. “어린이는 그것을 손안에 가지고 있고, 젊은이는 그것을 읽으며, 어른은 그것을 이해하고, 노인은 그것을 두고 찬양한다.” 다시 말해 고전이란, 세련된 전문가를 위한 특별한 작품이 아니라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자기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교황은 이런 작품으로 단테의 《신곡》,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히페리온》을 꼽았으며, 도스토옙스키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_장정일


고전을 읽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말한다.

하나는 그 시대의 인물과 시간을 살아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고전을 현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여 오늘날의 문제의 실마리를 찾는 데 있다.


이탈로 칼비노는 열네 가지로 고전을 정의한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일러준다. 고전을 읽어야 하지만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도 왜 읽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고전을 왜 읽는가에 대한 물음에 관한 해답은 이탈로 칼비노가 말해준다. “고전은 무언가에 ‘유용하기’ 때문에 읽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고전은 읽지 않는 것보다 읽는 게 낫다는 것이다.” 고전에서 많은 것을 얻으려 하지 말고 안 읽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만 하자. 

지금 책 읽기를 시작하자.


고전을  읽는가? _이탈로 칼비노


1.  고전은 보통 “나는 …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 를 읽고 있어”라고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


동사 ‘읽다’ 앞에 붙은 ‘다시’라는 말은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이의 궁색한 위선이다. 그들을 안심하도록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아무리 청소년기부터 폭넓게 책을 읽어 왔다 해도 항상 읽지 못한 중요한 작품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지적해준다.


우리는 위대한 작품을 처음 읽을 때 매우 독특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러한 즐거움에는 어린 시절 읽었을 때 느끼는 것과는 매우 다른 기쁨이 있다. 모든 경험이 그러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읽는 책 모두에 독특한 흥미와 중요성을 부여하게 마련이다. 반면 성인이 되어 읽으면 더욱 세밀한 부분과 다양한 면모와 그 의미를 감상한다.


민주사회란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시민이란 타인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그것과 함께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시민을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


시민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愚衆이 된다. 책과 멀리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사회 관습의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기에 십상이고 수구적 이념의 하수인이 되기 일쑤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밀한 정신의 쾌락을 놓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나쁜 시민이다. _장정일


2.  고전은 그것을 읽고 좋아하게 된 독자에게 소중한 경험을 선사한다. 가장 좋은 조건에서 즐겁게 읽을 기회를 잡은 사람만이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읽은 책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거나 전혀 떠올릴 수 없다 해도) 성인이 되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이러한 내면의 핵심은 이제 우리의 내적 메커니즘의 일부로 남아 있다. 기억 속에서 사라질지 몰라도 어린 시절의 독서 경험은 특별한 잠재력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 씨앗으로 남아있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은 이 세상에 없는 책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직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내가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톨스토이도 다른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그 책을 읽어야 한다. 내가 한 권의 낯선 책을 읽는 행위는 곧 한 권의 새로운 책을 쓰는 일이다. _장정일


3.  고전은 특별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상상력 속에 잊을 수 없는 것으로 각인될 때나, 개인의 무의식이나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가면을 쓴 채 기억의 지층 안에 숨어 있을 때 그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을 재발견하는 경험을 반드시 한다. 작품은 그대로지만, 우리 자신이 작품 자체를 바꾸어 놓기도 한다. 또 작품을 다시 읽을 때마다 그 작품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따라서 ‘읽는다’라고 말하느냐, ‘다시 읽는다’라고 말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강물은 흐르고 사람은 변하기 때문이다. _ 헤라클레이토스


맹자는 책을 읽는 것을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길’이라고 말했다. ··· 독서의 길은 자기 속에 이미 있었으나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은 저자와 함께하는 여행이다. ··· 천천히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상쾌하고 시원하다. 그것도 깊은 여행이다. _구본형,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4.  고전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고전을 다시 읽게 되면 전보다 더 많이 자신을 발견한다. _클리프턴 패디먼, 《평생 독서 계획》


독서의 진정한 기쁨은 몇 번이고 그것을 되풀이하여 읽는 데 있다. _D.H. 로렌스


5. 고전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준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 溫故知新 _공자


6. 고전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하다.


책을 읽으면 옛사람과도 벗이 된다. 讀書尙友 _맹자


그저 시간이나 때우려고 읽는 사람은 좋은 책을 아무리 많이 읽은들 읽고 돌아서면 곧 잊어버리니, 읽기 전이나 후나 그의 정신은 여전히 빈곤할 것이다. 하지만 친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듯 책을 읽는 사람에게 책은 자신을 활짝 열어 온전히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읽는 것은 흘러가거나 소실되지 않고, 그의 곁에 남고 그의 일부가 되어, 깊은 우정만이 줄 수 있는 기쁨과 위로를 전해주리라. _헤르만 헤세


7.  고전은 이전에 행해졌던 해석의 그림자와 함께 다시 찾아온다. 그것이 한 문화 혹은 여러 문화에 (더 단순하게는 언어나 관습에) 남긴 과거의 흔적을 우리의 눈앞으로 다시 끌어온다.


고전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이전에 그 책에 대해 생각했던 이미지와 비교해 보면서 새삼 놀라게 한다. 이것은 바로 작품에 대해 이차 서적이나 주석분 · 해설서 등을 가능한 피하고 원전을 직접 읽으라고 계속해서 충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고전이 고전인 까닭은 바로 끊임없는 해석의 연속에 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늘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서 고전이 되는 것이다. 그럴 여지가 없다면, 그것은 고전이 아니라, 그저 ‘오래된 책’으로서 고서일 뿐이다. 고전의 가치는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고전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마다 거듭 새롭게 해석되면서 오래도록 고전의 명성을 누린다. 새롭게 해석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고전이 아니다. 죽은 자의 찌꺼기로 남을 따름이다. _정천구, 《맹자 독설》


8.  고전은 그것을 둘러싼 비평 담론이라는 구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그러한 비평의 구름은 언제나 스스로 소멸한다.


고전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 우리는 고전에서 잘 아는 것을 (혹은 잘 안다고 믿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고전 작품이 그것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것이라는 사실을 (혹은 그것이 작품과 모종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한다.


가장 필요한 책은 가장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_마크 트웨인


9.  고전은 사람으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 창의적인 것을 발견해 준다.


작품을 대할 때 아무런 불꽃도 일지 않는다면, 독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무감이나 조건 없는 경외의 관점에서 고전을 읽는 것은 아무런 소용없다. 오직 작품이 좋아서 읽어야 한다. 학교에서 읽는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자유롭게 읽을 때에야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책을 발견할 수 있다.


고전은 결코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힘을 지닐 때에만 고전이다. 그리고 그러한 힘은 재해석을 통해서 드러나며, 재해석은 늘 해석자의 구체적인 체험, 현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맹자》가 고전이라면 거기에 담겨 있는 힘이 재해석을 통해 용틀임을 할 것이고, 그 힘은 우리에게 필요한 통찰력을 줄 것이다._정천구, 《맹자 독설》


10. 고전은 고대 전통 사회의 부적처럼 우주 전체를 보여준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으뜸가는 이유는 우리와 멀리 떨어진 시대, 우리와 사뭇 다른 문화와 사유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_데이비드 덴비


11. 고전은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작품과 맺는 관계 안에서 마침내는 그 작품과 대결하는 관계 안에서 우리가 자신을 규정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말이란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자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공자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서도 텍스트를 넘어 공자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안 된다. 공자 마음을 이해하려면 공자의 말 한마디를 음미, 또 음미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자가 아파했던 삶의 흔적을 이해해야 한다. 공자처럼 아파보기도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곰삭아 공자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공자의 말도 제대로 해석되는 법이다.


공자의 말만 이해하는 데 주력한다면, 공자의 마음에 이르기란 어렵다. 공자의 말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더라도 공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날의 문제를 공자의 눈으로 바라볼 수도 없다. 고전을 읽는 목적은 결국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는 데 있다. 논어를 읽는 가장 중요한 목적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_이기동, 성균관대 교수


12. 고전은 그것 사이에 존재하는 일련의 위계 속에 속한다. 다른 고전을 많이 읽은 사람은 고전의 계보에서 하나의 작품이 차지하는 지위를 쉽게 알아차린다.


좋은 책이란 물론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 한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 구절을 통해 나 자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서는 거울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한 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 준다. _법정


13. 고전은 현실을 다투는 모든 글을 배경 소음(잡음)으로 물러나게 한다. 그렇다고 고전이 소음을 없앨 수는 없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기 때문이다. _신영복,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14. 고전은 배경 소음처럼 존속해서 남는다. 이는 고전과 가장 거리가 먼 현재에 대한 글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고전으로 채운 서가를 만드는 것뿐이다. 이 서가의 반은 읽은 책과 의미 있는 책으로, 그 나머지는 반은 읽을 책과 의미 있을 책으로 채운다. 우연한 발견과 경이를 선사할 책을 위해 빈 책장도 마련해야 한다.


고전은 무언가에 ‘유용하기’ 때문에 읽는 게 아니다.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고전을 읽지 않는 것보다 읽는 게 낫다는 것이다.


고전을 읽는 목적은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는 데 있다. _이기동, 성균관대 교수



이탈로 칼비노는 말했다.

혹여 누군가 고전을 구태여 읽을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다면, 시오랑(Emile Michel Cioran, 루마니아 철학자)의 다음 글을 인용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독약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피리로 음악 한 소절을 연습하고 있었다. ‘대체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요?’ 누군가 이렇게 묻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음악 한 소절을 배우지 않겠는가’”


고전은 오랜 세월 살아남은 책이다. 살아남은 책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살아남은 이유를 찾는 게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으로 살고 싶다면, 갑작스러운 인생의 위기에 흔들리고 싶지 않다면, 매일 조금씩 꾸준하게 책을 읽어라. 독서를 시작했다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삶의 고비를 넘는 지혜는 책이 준다. _사이토 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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