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초기 작품으로 대표작 중 하나가 『사람의 아들』이다. 인간의 이성과 신앙의 갈등을 액자 구조로 전개하였다. 민요섭의 고뇌의 산물인 아하스 페르츠, 진정한 '사람의 아들'로 묘사한다. 태생적 한계인지 결론은 회기 한다. 이문열은 신의 존재를 묻는 인터뷰에서 "필요해서 믿게 되었다. 신이 없는 세상과 신이 있는 세상 가운데 신을 희망하므로 유신론자다. 신은 있는 게 좋다는 생각에는 변함없다. 신을 찾을 수 있을지 확신은 없다."라고 했다.
『사람의 아들』은 1979년 오늘의 작가상 3회 수상작으로 1979년 발표 당시에는 중편소설, 1987년 장편으로 개작, 이후 1993년과 2004년(은경축(銀慶祝) 판) 그리고 2020년 개정했다.
『인자人子』에서 『사람의 아들』로 변해 간 모습을 살펴보자. 수상 소감, 심사평, 수상이유서, 초판부터 개정 5판까지의 서문을 시대 순으로 나열하였다. 시간 순으로 서문과 인터뷰를 보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소설은 그저 소설이지만... 결론을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 처음부터 정해진 결론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지구인의 절반이상이 존재할 것이라 믿는 신의 아들이라 믿는 그를 부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해진 결론이다. "신은 있는 게 좋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그럼에도 '사람의 아들'이 왜 있는지 모를 그의 아들로 변했을까? 책과는 무관하게 늘 궁금하다. 신이 필요한가?
오랫동안 사람들이 神의 얘기를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혹 하더라도 그들은 쑥스러운 듯 수근거려 말했고, 더러는 자기들의 隱語로만 말했다. 그래서 감히 내가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달아오른다. 그러나 신은 우리의 영원한 주제 중의 하나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두려움뿐, 긴 밤 물어뜯을 부끄러움뿐.
찬사가 아니라 질책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약속뿐이다. 벌써 수업이 끝났다고 착각하지 않겠다는 약속. 다시는 써놓고도 얼굴을 붉히지 않겠다는 약속. 그리고 무엇보다 이 상의 권위를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약속.
〈인간은 현재 반역의 본질적인 기획에 착수하고 있다. 그것은 은혜의 지배를 정의의 지배로 대치시키는 일이다.〉 이는 세계 질서에 대한 기독교적 정당화의 체계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는 오늘날의 상황을 지적한, 알베르 카뮈의 말이다. 「사람의 아들」은 바로 이러한 반역의 본질적인 기획을 실현시키고자 하다가 실패한 젊은 영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남호/문학평론가
「사람의 아들」은 人間存在의 根源과 그 超越에 관계되는 심각한 主題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主題追求의 단단함과 그 처리에 보여준 진지함의 무게는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플롯의 난점을 보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작품의 곳곳에서 古典的인 품위를 成就해놓고 있다.
이미 「塞下曲」을 통해서 組織과 規律 속의 인간 등을 치밀한 構成으로 보여준 바 있는 李文烈의 「사람의 아들」을 授賞作品으로 결정하면서 우리는 진지함이 그리 흔치 않은 文學的 品性임을 상기하게 되었다.
『오늘의 作家賞』 授賞理由에서
—1979년 12월 30일
이제 나는 대략 두 개의 이야기를 끝냈다. 집단과 개인에 대해. 神과 인간에 대해. 무성하던 70년대가 늦도록 외면해 오던 것들로서, 사실 이야기도 충분하지는 못했다. 나는 집단안에서 자행되는 여러 가지 불합리—특히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여러 부당한 학대를 알고 있었지만, 혹은 진부하다는 이유로 혹은 위험스럽다고 해서 그것들은 흘려버렸다. 나는 또한 우리의 새로운 神을 확연하게 제시하려고 했지만, 겨우 내가 한 것은 언어의 추상성과 애매성으로 자신의 무능을 瑚塗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이 두 개의 이야기는 내 손을 떠났다. 읽는 당신들의 것이다. 나는 불만스러운 대로 새로운 주제를 향해 다시 출발할 뿐이다.
얼마 전부터 나는 다소 엉뚱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모든 先知者들이 떠나버린 지금 天上의 소리는 더 이상 우리의 靈感을 자극하지 못한다. 오직 남은 것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우리들 자신의 목소리뿐이다. 作家란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그 목소리가 남보다 큰 사람이다. 그 큰 목소리를 가지고 잡담이나 침묵으로 이 시대를 지나간다는 것은 하나의 背反이다. 아니 그 이상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 숨 쉬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겨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제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은 바로 그 불안에 충실하려는 것이다. 반 토막의 검에 대한 과신과 도취, 남의 불행과 손해 위에서 추구되고 있는 행복과 이익, 多數의 결핍과 고통 위에서 구가되고 있는 少의 풍요와 안락,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금껏 묵인해 나와 내 이웃의 비굴에 대해 언어의 비수를 나는 갈고(磨) 있다. 西山에 올라 採薇歌를 부르게 될지라도 바라건대 神이여, 언제나 내가 깨어 있도록 보살피소서.
1979년 6월 11일
著者
—1979년 12월 30일 6판
초판은 1979년 6월 10일이다. 서문은 6월 11일. 〈다섯 번째 개정 신판을 내며〉에 보면 “특이하게도 그 초판 서문은 〈오늘의 작가상 선정이유서〉가 대신했다”라고 했다. 이 후기는 판을 거듭하다 어느 시점에 추가된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두 개의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과 「새하곡」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사람의 아들』 初版이 내게 주어 온 느낌은 고마움이면서도 또한 부끄러움이요 두려움이었다. 고마움은 그 책이 나의 모든 책 중에서 문학 안에서건 문학 바깥에서건 사실상 가장 많은 것을 내게 주었다는 데서 온 것이며,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그런데도 그 책이 내게 주관적으로는 가장 불만스런 것이었다는 데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한 번 펴낸 책을 다시 쓴다는 것은 어쨌든 쉽지가 않았다. 빨리 고쳐야지, 하면서도 다른 글에 쫓기어 하루하루 미루다가 재작년 ‘당분간의 絶筆’ 공언하고 나서야 겨우 여유를 얻었다. 나는 지난 2년 반에서 거의 절반을 이 마음의 빚을 갚는 일에 썼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모자라 이번에도 온전히 마음에 드는 작품이 된 것 같지는 않다. 말하자면 부끄러움이나 겨우 면할 정도일까.
독자들도 그러했겠지만, 초판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민요섭과 조동팔이 찾아낸 〈새로운 神〉의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지 못한 점이었다. 이런저런 마뜩잖은 고려로 초판에서 빼 두었던 〈쿠아란타리아書〉를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두 번째로 불만스러웠던 점은 민요섭의 回歸에 대한 설명부족이다. 앞서의 反基督的논리의 치열함에 비해 그는 너무도 손쉽게 기독교로 돌아가고 있는데, 그 점 후반부에서 어느 정도는 보충이 되었다고 본다. 원래는 민요섭의 日記 같은 걸 삽입해 철저하게 규명해 보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이 정도로 그친다. 세 번째는 자료의 부족으로 얼버무려 버린 아하스 페르츠 편력이다. 엘리아데와 다른 여러 宗敎史家, 비교종교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구체적인 여행기로 재생시켰다. 역시 넉넉하지는 않으나 그런대로 마음속의 부끄러움은 덜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밖에 본문의 거친 문장도 좀 손질되었고, 특히 초판에서 남경사가 찾아가는 곳마다 읽기 좋을 만큼의 노트(민요섭의)가 발견되던 구성의 공교로움을 없앤 것도 이번 改補의 한 내용이 되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소설의 골격이나 외양은 되도록 유지시켰다. 지금껏 여러 가지로 부족했던 이 책을 사랑해 주신 독자들에 대한 감사와 경의의 표시로서였다. 다만 한 가지 죄스러운 것은 새 책에 보충되거나 달라진 내용을 궁금히 여기는 독자에게 새로운 부담을 드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갈채에 귀먹지 않고, 文學外的 유혹에 눈멀지 않으며, 安住하지 않고 썩지 않음으로써 그 애호와 성원에 보답하리라는 다짐으로 사죄에 갈음한다.
1987년 1월 1일
李文烈
첫 번째 책을 펴내는 감격으로 가슴 뭉클했던 게 어제 그제 일 같은데 벌써 『사람의 아들』을 펴낸 지 사반세기가 지났다. 한 책이 출판되어 이십오 년 동안 절판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도 그 작가에게는 참으로 고맙고 기쁜 일이다. 거기다가 3판까지 100여 쇄, 이 책 한 권만으로도 200만 가까운 독자와 만났다는 것은 처음 책을 펴낼 때의 그것에 못지않은 감격이 된다. 이 세상과 사람들에 계 무어라 감사해야 할지. 말과 글이 우리 감정을 펼쳐보이는 데 그리 넉넉하지 못함을 세상 느낀다.
하지만 『사람의 아들』, ‘은경축(銀慶祝)‘이 다가오면서 먼저 나를 사로잡은 것은 세월이 가도 줄어들 줄 모르는 부끄러움과 빚진 느낌이었다. 부끄러움은 젊고 무모했기 때문에 용감하게 덤벼들 수 있었던 이 작품의 주제와 배경 때문이다. 주제가 되는 기독교 철학은 중세 천 년 동안 서양 천재의 절반을 소비했고, 배경이 되는 시대와 지역은 세계 삼대 고대 문명의 바탕 위에 헬레니즘과 헤브 라이즘이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빚진 느낌은 이 『사람의 아들』을 시작으로 수십 권의 책이 더 출간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이 책이 내게 가장 많은 것을 준 책이라는 데서 비롯된 감정이다. 파인 이 책이 그런 대접을 받는 게 합당한 일인가.
그 부끄러움과 빚진 느낌이 이 책을 네 번째 개정판으로 만들었다. 쓸데없는 눈치만 늘고 안개 피우는 요령에만 밝아졌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가진 재주와 성의를 다해 손을 보았다.
인구어(印歐語) 번역체의 지나친 만문(漫文)은 스타일이 달라지지 않은 범위 안에서 되도록이면 간명한 단문(單文)으로 바꾸었고, 정리되지 못해 애매했던 관념들은 때마침 함께 진행된 번역 과정을 통해 범상해도 정직하게 규정되었다.
두리뭉실하게 한 덩어리로 읽여 있어 읽기에 지루하던 글을 열여섯 장(章)으로 나누어 나름의 순서로 매듭을 지었으며, 소설에 낯설던 각주는 궁색한 대로 후주 처리해 이물감(異物感)을 덜었다.
이전에 개정판을 낼 때는 언제나 당연한 듯 다음 판을 기약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완결을 다음 판에 미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이라는 기분으로 손을 보았으나, 이같이 자잘한 노력들이 내 부끄러움과 빚진 느낌을 얼마나 덜어줄지는 실로 의문이다. 다시 한번 독자 여러분의 호의와 관용을 빌뿐이다.
내 한 살이 [一生]는 하루로 치면 벌씨 넉 점 반인가, 아직 뜨지도 않은 노을이 가슴속에서는 벌써 아스라하다.
2004년 6월 15일
李文烈
이번 살이 [生] 마지막일 듯싶은 『사람의 아들』 개정 신판 추고를 시작하며 지나간 지 벌씨 오십 년이 다 돼가는 어느 해 늦봄의 막막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던 한 젊은이를 떠올린다.
그때도 조금은 일러 보이는 스물다섯 나이에 덜컥 결혼부터 하고 제 허물로 또래보다는 오 년이나 늦어진 입대를 그만큼 오랫동안 간절하게 바랐던 것처럼이나 조급해하며 소집영장을 기다리고 있던 젊은이가 있었다. 드디어 영장이 나오고 입영을 하루 앞둔 날 오후 그 젊은이는 마지막으로 고향 별정우체국에서 서울의 어떤 문예지 편집부로 한 공치의 원고를 부쳤다.
「인자(人子)」,라는 옛날식의 한자 제목을 단 200자 원고지 400매 남짓의 중편이었는데, 어찌 보면 고색창연한 구도소설(求道小說)이었다. 기원후 1세기 초 유대 땅에서 출발해 이집트를 거쳐 중근동을 가로지르고 페르시아며 멀리 인도까지 신들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는 실망하고 조국 유대로 돌아와 스스로 눈뜨기를 기구하던 젊은 구도자의 이야기였다.
‘아하스 페르츠’란 이름으로 알려진 그 주인공은 나중에 쿠아 란타리아 광야에 들어가 그곳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다가 자신을 찾아온 사탄의 시험을 물리쳤다고 의기양양해 있던 예수를 만나게 된다. 그 뒤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의 독선에 맞서던 그는 마지막 골고다 길목에서까지 예수를 부인하다 불사(不死)를 저주받았다고 한다. 그리다가 마침내는 적(敵)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획득하게 되는 인물인데 소설 「인자」는 짧지만 치열했던 그의 생애를 자못 경건하면서도 엄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잡지사의 작품 모집 공고에는 분명하게 '중편소설 200자 원고지 250매 내외'라는 매수 제한을 명시하고 있었으나 별로 개의치 않고 원고를 부친 그 젊은이는 이내 신혼의 아내와 함께 몇 달 얹혀살던 형님네 집으로 돌아와 별다른 내색 없이 그날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고향 장터 정류장에서 첫 버스에 올라 가까운 입영 장정 집진지로 떠났는데 —어떤 이는 이미 짐작했겠지만, 그때 우체국에서 부친 응모작 「인자」가 바로 이 장편소설 『사람의 아들』의 원형이었고, 그렇게 고향을 떠나 입대한 그 어설픈 젊은이는 다름 아닌 1973년 4월 하순의 나였다.
비롯 삼 년을 기한 했다고는 하나 이미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행에게 임신의 기미가 있는 어린 아내까지 떠맡기고 입대하는 내게 어찌 쓰라림이나 애틋함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속절없이 쌓여가는 실패의 기록에 대학중퇴와 병역기피가 겹친 사회적 불구가 강요하는 불편과 억압, 그리고 점차 짙게 덮씌워져 오는 무위도식과 부랑(浮浪)의 협의에서 일시에 벗어나는 후련함 또한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뒤 순탄치 못한 신병 시절로 입대 다섯 달 만에야 첫 휴가를 나오게 된 나는 복무지인 서울 근교 예비사단 정문을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거기서 가장 가까운 시내 대형 서점을 찾아갔다. 마침 나온 그 문예지 10월 호에서 그해 여름 중편 공모 당선작 발표와 심사후기를 찾아 읽어보기 위함이었다. 책을 산 나는 먼저 당선자와 당선작 명단에서 내 이름과 작품 제목을 찾아보았으나, 어찌된 셈인지 예심 풍과자 명단에도, 심지어는 응모작품 접수 명단 예조차 「인자」라는 작품 제목이나 그때는 주민등록 원본대로 쓴 내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다.
일등병 때 태어난 첫아이가 두 좋을 지나서야 삼십육 개월 만기 제대를 한 나는 그 뒤 대여섯 해 한때는 무슨 참사처럼 여겼던 그 낙선을 슬퍼하거나 분해하며 곱씹어 볼 겨를도 없이 보냈다. 대책 없이 또래와 학교를 떠나 홀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세상을 헤매느라 늦어진 사회복귀에 골몰해서였다. 그러다가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내가 형님 댁을 나설 때 함께 따라나선 어머니까지 합쳐 다섯 식구를 이끌고 대구로 나와 학원가를 전전하던 끝에 지방 신문사 늦깎이 신입기자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입사 두 해째로 접어들던 해 이른 봄, 어느 날 뜻밖의 계기가 그 중편 「인자」를 여러 해 묵은 습작 원고더미 속에서 다시 소환해 내게 만들었다.
그해 어떤 유력한 중앙지 신춘문예 공모에서 처음 선보인 중편 소설 부문에 「새하곡(塞下曲)」으로 당선돼 그때로서는 꽤나 늦은 편인 서른한 살 나이로 중앙문단에 나온 지 한 달쯤 되었을 때인가, 나를 등단시킨 중앙지 신춘문예 심사위원 가운데 한 분이 내가 근무하고 있던 대구의 신문사로 정중한 편지를 보내 자신이 편집 위원으로 있는 어떤 계간지에 실을 원고를 청탁해 왔다. 그해 봄 호 말미에 실을 중편이었는데, 편지를 받은 날로부터 하루 20매씩 추고가 필요 없는 원고를 써낸다 해도 그때의 통상적인 계간지 마감 일자에 당기에는 더없이 촉박한 청탁이었다.
그런데도 신춘문예 당신 뒤 첫 번제로 받은 무게 있는 청탁이라 그런지 나는 어떻게든 그걸 받아들여 내가 작가로서 자라는 데 도움이 되게 하고 싶었다. 그 손쉬운 대책이 한 달 만에 무리해 서 새로 쓰기보다는 재고로 가지고 있던 습작을 손보아 내는 방법인데,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육 년 전 바로 그 참혹하게 무시당한 중편 「인자」였다.
나는 그때까지 내 오래된 원고뭉치 속에 남아 있던 「인자」의 마지막 교정 원고를 갖아내 추고와 개작을 겸한 손질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이내 옛 실패의 원인이 한눈에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지난 육 년의 외롭고 힘든 세상과의 싸움이 창작의 안목과 작가로서의 담력을 키위 준 것인지 그 뒤 한 달 나는 거침없이 그리고 담대하게 그 해묵은 제고를 다듬고 재구성해 나갔다.
먼저 나는 급조한 현대 추리물 액자(額子)를 씌워 완전하고 절대적인 존재에 다가가는 주인공의 진지한 추구와 간절한 탐색과정을 감쌀 당의(糖衣)로 쓰기로 했다. 첫 번째 원고의 터무니없이 처절한 구도(求道)의 결의나 설익은 깨달음의 정색한 토로가 그때의 심사위원들을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하게 만들었을까를 상상하면 진땀이 다 솟을 지경이었다. 제목까지 순우리말 『사람의 아들』로 바뀌게 된 그 당의정이 빚어지는 데는 그즈음 인기 있었던 국내외의 텔레비전 추리물 연속극이 요긴한 참고가 되었다. 나는 한때 내가 채택한 그 당의 액자를 〈수사반장〉이라고 스스로 빈정 거린 적도 있다.
그다음으로 내가 공들여 손본 것은 겉보기에는 웅장하고 풍성하지만 또한 장황하고 공허하기까지 한 문장이었다. 「인자」를 쓸 무렵 나는 대강 두 갈래의 문장론에 깊이 빠져 있지 않았나 싶다.
하나는 그 작품을 쓰기 위해 여러 번 정독한 기독교 성경의 히브리어 꼭 수사학에서 온 것 같은데. 특히 분노와 징벌이며 한탄과 저주에 격렬한 구약 쪽의 언사와 용서와 구원, 위로와 약속에 신비한 효능을 보이는 신약 쪽의 상징과 비유 같은 것에 나도 모르게 깊이 감염되어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영탄이나 회억(懷憶), 그리고 과장된 비애 같은 것들로 화려하게 직조원 선지자들의 불꽃같은 예언과 여러 아가(雅歌)며 애가(哀歌)와 잠언들에서 그토록 찬연하던 비유법에도.
다른 하나는 에드워드 기번처럼 접속사를 많이 쓰고 수식 절이 긴 문장을 정중하게 번역한 것 같은 인구어(印歐語) 만연체 문장인데, 아마도 그 무렵에 우연히 빠져들어 정독한 방대한 『로마제국 쇠망사』와 관련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더 있다. 한때 흠뻑 위해 구절구절 외고 다녔던 토마스 울프의 문장들, 한 문장에서 동시에 낙인돼 있는 여남은 개의 주어나 목적어, 보어들. 한 명사를 수식하는 두 손 가득 꼽을 형용사나 한 형용사를 수식하는 대여섯 개의 부사들. 그러나 문장 전체로 보아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빼거나 바꾸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그 크고 거센 물줄기 같던 문제. 한 문장에 백 개가 넘는 단어를 써서 근엄하고 단정한 편집자의 골치를 썩였다는. 거기다가 가만히 돌이켜 보면, 각급 학교에서 헬레니즘 교육을 받고 자라면서 은연중에 스며든 그리스 수사학의 기분이나 로마의 웅변 연설문체도 간결이나 우미(優美)와는 멀다.
그 밖에 한 번 더 힘을 쏟아 다듬은 것은 주제를 심화하거나 관념과 사변을 보다 명징하게 드러낼 수 있게 하는 쪽이었다. 비유나 상징의 모호함 뒤에서 안개 피우지 않고 자료의 나열 뒤에 어물쩍 숨지 않기. 등의 강조사항도 그때의 창작메모에서 눈에 띈다.
액자 소설 형태가 되면서 예수의 안타고니스트 격인 주인공의 멀고 긴 편력도 장전로 나뉘어 전보다 훨씬 읽기 편하고 이해하기 쉽게 재편할 수 있었다. 이집트에서 중근동 여러 고도(古都)와 페르시아를 거쳐 멀리 인도까지 이르고, 다시 서쪽으로 지중해를 건너 로마에 머물면서 멀리 화랑 밀레토스에서 왔다는 애지(愛知)라는 신들까지 만나보고 조국 유대로 돌아오는 아하스 페르츠의 긴 여정을, 조금은 공교롭지만 액자 부분의 수사과정에 따라 적당히 나누어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추가된 액자 부분의 원고가 중편소설에 허용된 최대치의 원고매수를 넘기게 되는 게 걱정되었으나, 그것도 주인공의 구도여행을 축약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잡지사에 보낼 때쯤에는 양쪽 합치 최대 500매를 넘기지 않게 조정되었다. 제목조차도 이전의 한자표기가 달린 「인자(人子)」를 당시 새로 번의 돼 나온 기독교 성경에서 쓰는 대로 우리말 『사람의 아들』로 바꾸었다.
그런데 그렇게 변용된 원고를 청탁한 계간지로 마감날짜에 맞춰 보낸 지 일주일도 안 돼 나는 그 편집인인 평론가 선생님으로부터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중편 『사람의 아들』은 그 봄 호에 싣지 않고 여름 호에 발표하는 무슨 작가상 현상모집 응모작으로 돌린다는 내용을 양해도 구하지 않은 통보 행태로 전해왔다. 그리고 그 통보를 어떻게 받아 들어야 된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한 달이 지나고, 어느 날 국내 일간지 문화면마다 그해 〈오늘의 작가상〉에 『사람의 아들』이 뽑혔다는 기사가 내 얼굴 사진과 함께 크고 작은 박스기사로 쏟아져 나오듯 실렸다.
이어 신춘문예 당선 때보다 더 편질나게 신문사와 방송국 인터뷰에 불려 다니는데 『사람의 아들』 전문이 게재된 그 계간지 여름 호가 며칠 앞당겨 나오고 다시 단행본 『사람의 아들』 초판이 잇달아 나왔다. 특이하게도 그 초판 서문은 〈오늘의 작가상 선정이유서〉가 대신했다.
그 뒤 『사람의 아들』은 세 번 더 개정 신판을 냈고 어림잡아 200쇄 가까이 찍었다. 어림잡은 것은 초판 100쇄인데, 그때는 판매부수를 감추기 위해 출판사 대부분이 쇄 수와 인쇄부수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을 때라 나중에는 출판사 내부문서로서도 확인할 수 없었다. 내가 받은 인세로 역산하면 팔 년 동안 100만 부는 되는 것 같아 1쇄 1만 부로 쳐서 100쇄로 추산했다.
참고로 『사람의 아들』 초판 인지에 쓰기 위해 나는 플라스틱 도장을 하나 팠는데 2판 때 다시 쓰려고 보니 도장 테두리가 닳아 이지러지고 자체도 고르지 않아 2판에서는 질 좋은 석제도장으로 바꾸었던 기억이 난다. 출간하고 나서 사 년 뒤에 장만한 대구의 괜찮은 단독주택도 태반은 『사람의 아들』 초판 인세가 감당했을 것이다.
초판 구 년 뒤에 2판을 냈다. 환골탈태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원고지 480매의 중편이 1,200매가 넘는 장편으로 바뀌었는데, 그 경위나 과정은 이 주책없는 서문 뒤에 첨가된 〈2판 서문〉에 잘 나와 있다. 지금처럼 감회에 차서 썼으면 그 정도 길이로는 어려웠겠지만 그때는 젊어 절제할 힘이 있었고,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을 감상적으로 회상하는 버롯도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출판사가 정확한 판매부수까지는 몰라도 쇄 수는 제대로 밝히는 시절이 와서 29쇄까지 찍은 걸로 나와 있다.
3판은 2판 육 년 뒤인 1993년에 나왔다. 그때부터 제대로 된 장정본의 행태가 되었는데 계기가 무엇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문을 따로 붙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수정이나 추고 수준을 넘는 소설 내용의 변개가 없는데 왜 판을 갈았는지는 역시 기억에 없다. 그 뒤 십 년 동안 24쇄를 찍었다. 그때까지도 평균으로 한 쇄에 5,000부는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지막이 4관에 해당되는 은경축(銀慶祝)판이 된다. 초판 출간 25주년이 되는 2004년 봄에 미국 출입이 잦은 어떤 출판인이 바람을 넣었다. 출판 25주년이 되도록 판매가 유지되는 책은 흔하지 않다. 미국에서는 은경축 잔치를 벌이는데, 그때 새로 내는 책을 은경축환이라고 해서 작가와 출관사가 함께 축하파티를 한다·…. 그 소리에 작가와 출판사 모두 귀가 솔깃해 급조하게 된 것이『사람의 아들』4판 은경축관이 된다. 이 서문 뒤에 〈은경축 판 서문〉으로 첨가해 그때의 개판(改版) 분위기를 대강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나름 공들인 작가의 개정과 추고가 있었고, 표지 디자인이나 제분 장성 여러 곳에서 보여주는 출판사의 호감과 성의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다시 십사 년이 지나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판이 되는 『사람의 아들』 2018년 1월 2일 판에는 19쇄로 나와 있다.
쓰다 보니 터무니없이 길어져 민망스럽다. 서문으로는 격식도 맞지 않고 쓸데없는 감회와 자기 해설로 너무 길어졌다. 얘기를 늘어놓을수록 뭔가 꼭 들어가야 할 게 빠진 듯한 불안과 조바심으로 턱없이 원고 매수만 늘어진 게 아닌가 싶다. 이 또한 헛된 늙음이고 부질없는 비감인가.
하지만 그래도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하나 더 있다, 라기보다는 이제까지 까맞게 잊고 있다가 글을 맺고 나서야 퍼뜩 떠올리게 된 내 오래 주저와 고심이 하나 있다. 이번 서문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다 여겨 끄트머리에 그간의 술회 삼아 덧붙인다. 바로 아하스 페르츠라는, 예수의 저주를 받아 그가 재림할 때까지 죽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야 한다는 그 전설의 주인공 이름을 둘러싼 구구한 논의다.
내가 아하스 페르츠를 처음 만난 것은 열아홉 살 때 억지스레 읽은 날림번역 니체의 책에서였다.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의 첫 장 어딘가 ‘영원한 방랑자’한 말의 각주(脚註)에 아하스 페르츠란 이름이 독일어 철자로 표기되고 마침표 위에 따 두 줄로 그 행적이 나와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혹은 아하스베투스란 라틴어식 발음의 이름을 독일식으로 바꾼 듯한데, 문제는 그게 내 소설 『사람의 아들』에 나올 때 느끼게 되는 이질감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나 베드로 바울 요한 또는 아나스 바라바 가야바 같은 번역 성서 속 당대 유대사람들의 이름과 함께 나오면 왠 지 어울리지 않게 들리는 게 그랬다.
나는 『사람의 아들』 3판을 낼 때가 되어서야 그 어색함을 느끼고 어떻게 해보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이 땅의 수백만 독자에게 그렇게 알려진 이름이라 생각처럼 쉽게 바꾸지 못하고 어물쩍 넘겨버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 페르츠란 이름이 독인어권에서는 아직도 흔히 쓰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4판에서 다시 아하스 베루스로 바꾸자고 말을 내어 보았는데, 하필이면 그게 출간 25주년 은경축(銀慶祝) 판이라 잔치에 흥을 깬다고 사방에서 말리는 바람에 또 주져 앉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 개정 신판이 내 생전의 마지막 추고나 개정의 기회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자 나는 다시 그 문제에 신경이 쓰였다. 신판 교정지를 바로잡고 고쳐나가는 틈틈이 문단의 지인들이며 출판인들, 그리고 교유가 있는 비평가나 독자들에게까지 아하스 페르츠 이름 바꾸는 일을 슬며시 논의해 보았다. 하지만 논의를 시작하고 달포가 넘도록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그 대답은 강력한 반대로 나타났다.
‘방랑하는 유대인’이란 통칭으로 ‘파우스트 박사’만큼이나 서구 문학과 여러 예술 장르에서 다뤄지는 아하스 페르츠의 이름은 나라나 언어권에 따라 참으로 여럿이었다. 독일어식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계열, 그리스 라틴 계열, 프랑스어 스페인어 쪽 발음도 있었다. 하다못해 일본의 대중작가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의 소설에서도 건달 국제무기상이 ‘에헤이 줄스’란 서명을 쓰는데, 멋 부린 설명이 아니더라도 그 서명은 틀림없이 아하스 페르츠의 영어식 표기 발음일 것이다.
그래서 나도 이 서문을 끝내기 직전 들어서야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그래, 한국 문학에서는 독일식 발음 아하스 페르츠로 수용되었다. 앞으로 『사람의 아들』 개판이 열 번 더 있고 내게 그만큼의 추고 와 개정 기회가 더 주어진다 해도 나는 그 이름을 바꾸지 않겠다. 그 이름을 내게 처음 알려준 니체의 책에 대한 예우로도 온당치 않다고.
2020년 부악산 자락에서
이문열
―소설 '사람의 아들' 구판(舊版)과 신판을 한 탁자에서 보니 40년을 가로지르는 느낌이다.
▷중편을 장편으로 늘려 ‘꼴’을 갖춘 게 1987년인데, 개정판을 또 냈다. 마지막이다. 장황하고 공허한 문장을 손봤고 액자소설임을 고려해 서체를 달리했으며 미주(尾註)를 각주로 배치해 이해도를 높였다. 오래 붙잡아서 그런지 혈육 같은 책이다.
―대학 중퇴의 20대 청년이 써둔 습작품이 세기가 지나도 신학대 필독서로 읽힌다. 왜 그때 신이었을까.
▷성년이 될 즈음,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첫 장에서 '영원한 방랑자'의 각주에 전설 같은 인물 '아하스 페르츠'란 이름이 짧은 행적과 함께 독일어 철자로 표기돼 있었다. 아하스 페르츠와의 만남을 다룬 나만의 서사시를 19세쯤에 써뒀었다. 신앙은 내게 오랜 질문이었다.
―종교란 허상일까.
▷엘리아데는 신이 원망과 공포의 구체화임을 간파했다. '사람의 아들'은 저 엘리아데에의 감동으로부터 나왔다. 바다의 무서움이 포세이돈을 낳았고 태양의 부재(不在)가 무서워 태양신이 만들어졌다. 원망과 공포가 개념을 입으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이게 다신교가 된다. 기능의 조합이 이뤄지면 다음 단계는 신의 육화(肉化)와 인격화다.
―허위를 고발하려 했던 건지.
▷허위까진 아니어도 끈질긴 물음이었다. 하나의 종교에는 수백 개의 신이 있고 종교는 상호 간 그림자를 가진다. 불교도 기독교도 신이 사람으로부터 잉태되어 고통을 맛본 뒤의 이야기 아닌가. 인간은 신성(神性)을 필요로 한다. 신성이 육신을 벗으면 그다음 단계는 이데올로기다. 그게 우리의 세계다.
―소설 내부로 좀 더 깊게 들어가 보자. 실천신학도 민요섭은 왜 신을 그리려 소설이란 형식을 택한 걸까.
▷정확히는 아하스 페르츠 전기(傳記)에 가깝지만 그가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슬퍼하기도 하니 소설이기도 할 것이다. 그 질문은 질문 자체에 답이 있다.
―신의 대척점을 논한다는 것은 오히려 신을 강력하게 느껴서는 아닌가.
▷곤혹스러운 질문인데 내 대답은 이거다. '난 유신론자다. 그러나 필요해서 믿게 되었다. 신이 없는 세상과 신이 있는 세상 가운데 신을 희망하므로 유신론자다.' 신은 있는 게 좋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신을 찾을 수 있을지 확신은 없다.
―다시 소설 '사람의 아들'로 잠시 돌아가 아하스 페르츠를 만난다면 어떤 질문을 나누겠나.
▷'방랑하는 유대인, 죽지 못한 자여. 당신은 정말로 존재했는가. 그리고 정말 당신의 그런 세상이 있더냐?'
신은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가?
자비롭고 사랑 넘치는 그 신이 맞는가
야훼가 예언한 바에 따라 동방박사 세 명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돌아오는 길에 검붉은 별 하나를 보게 된다. 그들은 원인 모를 공포와 전율에 사로잡혔다. 불길하면서도 음험한 유혹의 빛이었다. 그 시각 샴마이학파 율법사 집에서 진정한 사람의 아들 아하스 페르츠가 태어난다.
아하츠 페르츠는 열 살 밖에 안 됐음에도 토라를 거의 암송할 정도였고,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유대에서 제일가는 랍비로 기르고자 했다. 열두 살 되던 해, 아하스 페르츠는 동네 꼬마들이 놀려대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중년 사내 테도스를 만난다. 굶주려 보이는 그에게 빵과 고기를 건네주며 아하스 페르츠는 테도스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떠벌리며 다녀서 아이들이 놀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테도스는 아하스 페르츠에게 “네가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외우고 있는 토라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것 같니?”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테도스는 아하스 페르츠를 빈민가와 지하감옥, 처형장을 데리고 다니며 배고픔에 굶주린 사람들, 고통에 힘겨워하는 사람들, 신을 애타게 찾지만 도와주지 않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지금 이 순간도 수천수만의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미신에 젖은 채 고통 속에 헛되이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한다. 열두 살의 나이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열여덟 살의 아하스 페르츠는 육신도, 지식도 완전히 성숙해 있었다. 그는 욕망에 눈 떠 아삽이라는 동네 부호의 젊은 아내를 유혹하고 스스로 성년의 여러 죄악들에 앞질러 빠져들기도 했다. 어느 날은 아내를 팔아 산 아브라함의 부귀와 형의 축복을 훔친 야곱의 간사한 지혜를 비방하다 돌팔매에 쫓기는가 하면, 다른 날은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을 몰살시키고, 수많은 성읍에서 숨 쉬는 것은 모두 없애도록 조상들을 부추긴 야훼의 잔혹을 비꼬다 고발당하기도 했다. 아하스 페르츠 앞에서 늙은 제관들과 은수사들은 머리를 흔들고 탄식하며 물러났고, 뼈대 있는 율법사나 서기관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그렇게도 열렬히 믿고자 했던 신을 끝내 잃어버리게 된 자의 공허감 때문이었을까? 그는 뒷골목의 여인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렸고 거리의 건달들과 피투성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홀연히 아하스 페르츠는 고향 땅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뒤 십 년의 세월 동안 아하스 페르츠는 ‘신들의 고향’으로 불리는 이집트를 시작으로 중근동, 바빌로니아, 페르샤, 인도, 다시 서쪽으로 로마를 돌아다니며 ‘참된 신’을 찾고자 세계를 더듬는다. 그러다가 평생 해를 알려고 뚫어져라 해만 봐서, 두 눈의 동자가 타버렸다는 장님의 “정녕 해가 있다면 그것은 당신들이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가진 어떤 추상일 뿐이오.”라는 말에 아하스 페르츠는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본인 역시 자기가 골몰하여 걸어온 지난 십 년이 그대로 탄식할 만한 헛됨의 세월이었다면, 신을 논리와 지식으로 붙잡으려는 현재의 노력 또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몸과 마음의 낭비로만 보였다. 마침내 아하스 페르츠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 뒤 아하스 페르츠는 고향의 광야, 쿠아란타리아에서 단식과 묵상에 잠겨 참된 신의 부름을, 십 년 동안 애타게 찾아 헤맸으나 끝내 만나지 못한 ‘위대한 신성(神聖)’과의 대면을 기다렸다. 마침내 한 외침이 우레처럼 그를 흔들어 깨우며 그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온 ‘위대한 신성’을 만난다. 위대한 신성은 하루 낮 하루 밤을 그와 함께 하며 기나긴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후 광야를 벗어난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를 다섯 번에 걸쳐 만난다. 첫 번째 만남은 바위산 기슭에서였다.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천상의 기품이 서려 있음을 느꼈다. 이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에게 아하스 페르츠는 배고픈 자들에게 빵을 줄 수 있는지 묻는다. 예수는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인간은 영원히 결핍과 갈구하는 것이 숙명인가, 라며 한탄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허약한 육체와 영혼으로 고통받고 방황하는 인간을 위해 빵과 기적과 권세를 요청하였으나 예수는 자신의 권능을 자랑하기 위해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것은 아니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그의 요청을 거부한다. 예수는 아하스 페르츠를 사탄으로 규정하고, 아하스 페르츠 역시 예수가 약속한 구원의 허구성을 보고 그를 거부하기로 결심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를 제거할 음모를 진행한다. 그리고 예수가 인간적인 구원을 기어이 거부하자 로마의 힘을 빌려 그를 처형하고 만다. 아하스 페르츠는 기약 없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끝없이 이 세상을 떠돌고 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