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에서 시작된 징계와 반성의 정신,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내가 그것을 징계하여 후환을 삼간다.” 하였으니, 이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전란을 겪는 것은 불행이지만, 전란 이후의 사정을 기록하고 후세에 교훈을 남기는 일은 더 어려운 과업이다. 그 점에서 징비록은 위대한 기록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임진왜란의 원인과 결과를 정리하며, 후일을 경계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작 그 경계의 정신은 조선 사회에 널리 퍼지지 못했고, 역사의 교훈은 외면당했다. 징비의 정신을 일본은 받아들였고, 조선은 외면했다. 그런 점에서 경술국치로 이어진 조선의 멸망은 징비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역사는 반복된다. 특히 반성하지 않는 민족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늘 나쁜 역사를 되풀이하고, 무지한 지도자 밑에서 인민만이 고통을 받는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평양으로, 신의주까지 도망쳤다. 나라의 운명을 명나라에 의탁했다. 360여 년 뒤, 6.25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이승만은 서울을 버리고 피신했다. 한강 철교를 끊고, 미국에 도움을 청했다. 반복되는 비극이다. 모두가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조선 분할과 군주 교체를 공식적으로 논의했다. “조선이 이미 제대로 왜적을 막지 못하여 중국에 걱정을 끼쳤으니, 마땅히 그 나라를 둘이나 셋으로 나누고, 왜적을 막아내는 실적을 보아 나라를 맡게 하자.”는 발언이 오갔다. 선조는 이에 스스로 왕위를 내놓겠다는 ‘양위 선언문’을 발표했다. 병든 자신이 아직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며, 전쟁을 막지 못한 것은 의리상 말할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당대의 한계였겠지만, 그 무능한 군주를 붙잡고 함께 울던 류성룡을 비롯한 사대부들의 태도는 지금 봐도 절망적이다. 무능한 군주를 섬기는 것이 과연 신하의 도리였을까?
비록 실패했지만 만적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씨가 있으랴!”라고 외쳤다. 천한 노비가 감히 신분제를 부정했다. 100여 년 전 정도전은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조선을 세웠다. 만일 조일전쟁 이후 또 한 번의 혁명이 일어났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교훈을 모르는 민족은 반드시 멸망한다”라고 말했다. 이 진단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징비(懲毖)’는 시경의 구절 “내가 그것을 징계하여 후환을 삼간다(予其懲而毖候患)“에서 나왔다. 전쟁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1948년 반민특위의 실패라는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하려 하고 있다. 이승만과 친일 세력은 경찰력을 동원해 국회의 결정에 따라 구성된 반민특위를 사실상 무력화했다. 경찰 수뇌부는 친일 인사로 채워졌고, 이승만은 그들을 이용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좌초시켰다.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친일은 처벌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윤석열 정권이 벌인 내란의 진실은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내란은 단순한 정권의 실패가 아니다. 국가의 근본을 뒤흔드는 반헌법적 범죄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징비’를 남겨야 한다. ‘내란행위특별법’을 제정하고, 그 과정을 역사에 남겨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 1949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징비의 진짜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