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을 알아야 개념이 선다
개념이란 무엇인가?
개념槪念은 일종의 관념關念이다. 관념은 관념인데, 감각적인 관념이 개별적인 관념인 것과 달리 개념은 보편적인 관념이다. 모든 학문은 개념을 잘 정의하고 그 개념을 체계적으로 잘 엮어서 이론화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어떤 상황을 주더라도 그 상황에 원리적으로 잘 대처할 수 있게 하는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한다. 그만큼 개념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수단이다.
개념은 기본적으로 감각적인 복합 관념과 어떻게든 관계를 맺어야 한다. 관계를 맺지 않는 개념이란 엄밀하게 말하면 그다지 쓸모가 없다. 칸트는 “감각적 직관이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감각적 직관은 맹목적이다.”라고 언명言明했다.
개념이란 항상 다른 개념을 통해 설명된다는 것이다. 개념은 항상 정확하게 정의되어야만 쓸모가 있다. 그래서 정의를 정의적 설명이라고 달리 말하기도 한다. 피설명항인 개념은 설명항에 속한 다른 개념에 의해 설명된다. 개념은 항상 정확하게 정의되어야만 쓸모가 있다.
개념은 기본적으로 보편적인 관념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주어진 감각적인 관념에 관해 개념을 활용해서 보편적으로 질서를 짓는 것이고, 나아가 주어진 개념의 복합에 대해 또 다른 개념을 활용해서 보편적으로 질서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개념을 사유의 도구라고 한다.
재야 철학자 조광제의 《철학 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에 서술한 ‘개념’에 대한 개념이다. 문자로 정리하다 보면 사물의 실체가 분명해진다. 쉽게 말해, 개념이 잡힌다. 정리하면 정리가 되고 개념이 잡힌다. 또 정리된 것을 읽는 것만으로도 개념이 잡힌다.
덧_
言明 : 말이나 글로써 의사나 태도를 똑똑히 나타냄
개념이라는 말은 요즘 광고계나 건축계나 예술계에서 매우 많이 쓰인다. “이번 기안의 콘셉트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산업계 특히 광고업계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철학적으로 볼 때 개념은 일종의 관념이다. 관념은 관념인데, 감각적인 관념이 개별적인 관념인 것과는 달리 개념은 보편적인 관념이다. 보편적인 관념이란 다른 여러 관념, 예컨대 개별적이고 감각적인 단순 관념이나 복합 관념을 일반화해서 포괄적으로 관계하는 관념이다. 이때 개념은 감각적인 관념을 싸잡아 지시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감각적인 관념 간의 관계를 지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을 많이 알고 있으면 덩달아서 그 개념이 포괄적으로 관계하는 감각적인 관념을 쉽게 떠올릴 수 있고 그 감각적인 관념 간의 관계까지 함께 떠올릴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똑똑해진다는 것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각기 특수한 감각적인 관념이 작동하는 구체적인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개념이다. 주어진 상황과 관련된 개념을 활용해야만 그 상황의 본질을 잘 알 수 있고, 그럼으로써 그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면 모든 학문은 개념을 잘 정의하고 그 개념을 체계적으로 잘 엮어서 이론화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그 상황에 원리적으로 잘 대처할 수 있게 하는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한다. 그만큼 개념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수단이고, 그래서 지금 우리는 철학의 기초 개념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개념에도 급수가 있다. 철학의 기초 개념은 모든 학문에서 활용되는 여러 개념을 뒷받침하는 근본 개념이어서 그 급수가 최고로 높다.
흔히들 개념에는 경험적인 개념과 범주적인 개념이 있다고 한다. 경험적인 개념은 흔히 보통명사라 불리는 것들로 표기된다. 그리고 범주적인 개념은 흔히 추상명사라 불리는 것으로 표기된다. 흙, 물, 공기, 불, 지구, 지진, 참나무, 원숭이, 인간 등은 모두 경험적인 개념이다. 여기에는 우리는 철학의 기초 개념이 대체로 범주적인 개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개념은 기본적으로 감각적인 복합 관념과 어떻게든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렇게 관계를 맺지 않는 개념이란 엄밀하게 말하면 그다지 쓸모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는 감각론적 유물론에 입각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예컨대 칸트의 “감각적 직관이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감각적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유명한 언명에서도 잘 지적된 바 있다.
‘원숭이’라는 말로 지칭되는 원숭이 개념은 원숭이처럼 생겨먹은 모든 감각적인 복합 관념을 한꺼번에 표상해서 생각할 수 있게 한다. ‘한꺼번에’라고는 하지만 그 모든 감각적인 복합 관념을 실제로 한꺼번에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렇게 되면 머리가 너무나 시끄러워서 터져나가고 말 것이다. 이때는 ‘추상적인 방법으로 한꺼번에’ 떠올리는 것이다. 어쨌든 한꺼번에 떠올려 지칭하도록 하는 것을 보편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개념은 기본적으로 보편적인 관념인 것이다.
그런데 사유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주어진 감각적인 관념에 대해 개념을 활용해서 보편적으로 질서를 짓는 것이고, 나아가 주어진 개념의 복합에 대해 또 다른 개념을 활용해서 보편적으로 질서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개념을 사유의 도구라고 한다. 참고로 사유의 대상이 되는 감각적인 관념을 사유에 제공하는 것이 바로 지각과 상상이다. 그러니 인식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지각과 사유의 관계라든가, 상상과 사유의 관계라든가, 이 셋 모두의 관계라든가 하는 것을 분석해서 파악하여야 하는데, 상당히 복잡한 문제다.
흥미롭기도 하고 까다롭기도 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개념이란 항상 다른 개념을 통해 설명된다는 것이다. 설명되는 항을 피설명항이라고 하고, 설명하는 항을 설명항이라고 한다. 설명항으로써 피설명항을 설명하는 것을 정의라고 한다. 개념은 항상 정확하게 정의되어야만 쓸모가 있다. 그래서 정의를 정의적 설명이라고 달리 말하기도 한다. 피설명항인 개념은 설명항에 속한 다른 개념에 의해 설명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한 개념에 대한 정의적인 설명이 완벽하게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설명항에 속한 여러 개념이 다시 설명되어야 한다. 그럴 때 설명항에 속해 있으면서 설명되어야 하는 개념은 피설명항이 된다. 이 피설명항에 해당하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개념이 필요하고, 또 그 다른 개념 역시 설명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개념 설명은 무한 연쇄의 부조리에 빠지게 된다. 결코 어느 한 개념이 무엇인가를 완전히 설명해서 결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염두에 둔 것이 데리다의 차연, 즉 차이를 바탕으로 계속으로 의미가 결정되지 않고 연기된다는 것이다.
본래 개념은 그 자체로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존재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이다. 이데아는 자기 안에 자기 아닌 것이 전혀 없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이런 이데아를 바탕으로 해서 개념이 생겨나기 때문에 개념 역시 자기 안에 자기 아닌 것이 없는바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자연을 통해 그 어떤 개념도 자기 동일적일 수 없음을 밝혔다.
데리다의 차연 개념에 대해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이 오스트리아가 낳은 천재적인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가족 유사성’이다. 하나의 낱말은 쓰임새를 벗어나서 뜻을 가질 수 없고, 또 그 쓰임새에 따라 계속 조금씩 뜻을 달리할 수밖에 없으므로 동일한 본질적인 뜻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가족 유사성이라는 개념이다. 가족 유사성이나 차연 등의 개념을 개발함으로써 1000년 이상 이어져온 플라톤의 본질주의가 크게 공격을 당하면서 위기에 처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낱말의 자기 동일적인 보편적 본질과 이를 형성하고 파악하는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 자체가 근본에서부터 기우뚱거리게 되었다는 의미다. 이른바 이성을 의문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발흥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생을 정의할 수 있는 본질적인 개념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 물음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행로가 달라질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생에 그런 본질적인 개념은 있을 수 없고, 각자가 제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독특하게 만들어간다고 하는 입장이 바로 실존철학적인 입장, 정확하게 말하면 현존 철학적인 입장이다. 현존주의는 근본적으로 본질주의와 대립되기 때문이다. 이 물음에 대해 우리 모두 한 번쯤 나름대로 답변을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답변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될 것이다.
_조광제, 《철학 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 생각정원,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