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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Aug 12. 2021

우리의 지도자 나폴레옹 동지는 모든 동물의 아버지다

사회주의 운동의 부활을 원한다면 소비에트 신화는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

권력 자체만을 목표로 하는 혁명은 단지 주인만 바뀔 뿐,
본질적인 사회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대중이 살아 깨어 있으면서 지도자를 감시,
비판할 때에야 진정한 혁명이 성공한다.


오웰은 《동물농장》 초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잘못된 혁명의 이야기이며 원래의 ‘주의主義’를 왜곡해 온 단계마다 준비된 탁월한 변명들의 역사이다.” 오웰이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했거나 소비에트 혁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게 아니다. 우크라이나판 서문에서는 “1930년 이후 나는 소련이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부를 만한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배자가 어떤 권력층보다도 더 확고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급 사회로 변모하는 분명한 조짐을 보았다”라고 했다. “나는 소련의 신화가 서구 사회주의 운동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과거 어느 때보다 분명히 깨달았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사회주의 운동의 부활을 원한다면 소비에트 신화는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진정으로 하고자 한 이야기는 스탈린주의이며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이다. 영국의 제국주의도 이 비판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 오웰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누구보다 열망했던 인물이다. 러시아 혁명이 독재자 스탈린의 등극으로 애초의 이상과는 다르게 전체주의적 상황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자신의 사회주의적 전망이 점점 절망적으로 흘러간 것이지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 스탈린 그리고 트로츠키를 연상하게 하는 동물이 나온다. 레닌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오웰의 소비에트 혁명을 바라보는 시각을 알려준다. ‘혁명은 실패하지 않았다.’ 단지 권력 자체만을 추구하는 혁명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다. 소비에트 혁명의 태동기를 말하는 게 아니라 스탈린주의로 불리는 전체주의가 사회주의 혁명을 망친 주범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대신해 레닌의 후계자가 되었다면 소련은 아직도 지도에 남아있을까? 혁명은 계속되고 있을까?



혁명은 변질되었다. 지도자 나폴레옹(스탈린)은 이제 그냥 지도자가 아니다. ‘모든 동물의 아버지’ 등 우상이 되었다. 성공적인 업적은 물론 어쩌다 생긴 우연도 그의 ‘공’으로 칭송되었다. 혁명은 이렇게  변질되어가도 있다. 절대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혁명은 애초의 목적과는 다르게 실패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제 단순히 ‘나폴레옹’으로 불리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공식적으로 ‘우리의 지도자, 나폴레옹 동지’라고 불렸으며 돼지는 그에게 ‘모든 동물의 아버지’, ‘인류의 공포’, ‘양 떼의 보호자’, ‘오리들의 친구’ 등의 칭호를 즐겨 붙였다. 스퀼러는 연설할 때면 나폴레옹의 지혜, 그의 따뜻한 마음, 모든 동물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 특히 다른 농장에서 무지와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불행한 동물에 대한 그의 사랑 등을 생각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다. 이제 모든 성공적인 업적과 모든 행운은 어김없이 나폴레옹의 공로로 돌려졌다. 암탉 한 마리가 “우리의 지도자 나폴레옹 동지의 보호하에 나는 엿새 동안 다섯 개의 알을 낳았어”라고 말한다든지, 암소 한 마리 가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나폴레옹 동지의 영도력 덕분에 물맛 한번 좋군 그래”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이 소설이 돼지와 인간이 서로 완벽한 화해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이것은 나의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돼지와 인간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언성을 높이며 입씨름하는 것으로 이 소설의 결말을 계획했다.” 소설의 결말이 왜 바뀌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단지 오웰이 예측한 대로 돼지와 인간의 좋은 관계는 2차 대전 종전으로 끝이다. 각자 자기의 길을 갔다.


절대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혁명은 애초의 목적과는 다르게 실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새로운 독재자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옛 독재자를 전복시켜 온 기록이다.


1943년, 소련이 연합국으로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했을 당시에 썼다. 오웰은 소비에트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지금 소비에트는 지구에 없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혁명은 실패인가? 누구도 그 혁명이 잘못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문제는 혁명의 진행과정에 나타난 돼지의 권력욕이다. 앞으로 사회주의 혁명에서 실패를 겪지 않으려면 돼지의 권력욕을 배제하고 이겨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소비에트에 국한된 이야기라고 한정 지을 필요 없다. 수많은 독재자가 처음부터 독재를 내세우며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구국의 결단이며 혁명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 돼지는 점점 변한다. 그들이 경멸의 대상이며 축출의 대상인 인간을 닮아간다. 아니 그들의 행태를 답습한다. 하나같이 정당성과 당위성을 말한다. 인간의 탈을 쓴 돼지인지, 돼지의 탈을 쓴 인간인지 구별할 수 없다.


돼지를 한 번 보고 인간을 한 번 보고, 인간을 한 번 보고 돼지를 한 번 보고, 번갈아 자꾸만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미 어느 쪽이 인간이고 어느 쪽이 돼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덧_

조지 오웰, 《동물농장》, 열린책들, 2009년 11월 세계문학판 1쇄




《동물농장》은 청소년에게도 필독도서이다. 책에는 나름의 해석이 들어있다. 그 해석이 과연 옳은지 의구심이 든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알려주는 책을 아이에게 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동 · 청소년 도서에는 어쭙잖은 해석으로 책의 질을 떨어뜨리고 보는 이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책은 ‘세계를 낭비하는 책’이다. 어떤 질병보다도, 어떤 살상 무기보다도 이 세계에 치명적이다. 종이를 낭비해 세계에 산소를 공급하는 나무를 죽인다. 이런 책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준 독자인 우리에게도 절반 이상 책임이 있다.


공산주의 혁명이 절대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 작품이며 오웰이 《동물농장》에서 말하려고 한 것은 바로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비판이다. 공산주의는 개인이 재산을 갖지 않고 모든 사람이 함께 일하고 나눠 갖는 계급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는 사상이다. 하지만 돼지가 점차 다른 동물을 지배하면서 이들 사이에 다시 계급이 생겨나고, 지배층은 다른 동물의 노동을 착취한다. 오웰은 공산주의 이론이 현실에서는 이론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곡과 역사적 시각의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혁명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 전체주의로 변하여 원래의 ‘사회주의’를 왜곡했다. 방향이 비틀어진 잘못된 혁명의 이야기이다. 1930년 이후 소련은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부를 수 없다. 지배자가 어떤 권력층보다도 더 확고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급사회로 가고 있었다. 오웰은 사회주의 운동의 부활을 원하다면 당시 소비에트 신화는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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