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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Aug 16. 2021

루쉰이 일러주는 책을 읽는 법과 글을 쓰는 이유

모든 문예는 선전이다. 그러나 모든 선전은 다 문예가 아니다

내가 어떻게 경제학을 알겠으며 선전문구를 보았겠는가《자본론》은 읽은 적도 없고 손도 대본 적이 없다나를 눈뜨게  것은 현실이다그것도 외국의 현실이 아니라 중국의 현실이다. _요극에게, 1933


루쉰이 일러주는 책 읽는 법


그때나 지금이나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지는 젊은이의 고민이었다.  읽기에 대한 고민을 서신으로 루쉰에게 물어본 내용에 대해 답한 글과 자신의 잡문에  읽기에 대해 적은 글이다.

루쉰는 고전만을 고집하는 식의 상투적인  읽기를 권하지 않는다. 단지 문학만 읽지 말고 과학 관련 책도 권한다. 또한 (당시 상황에 적절하고 지금도 유효한) 여행기를 읽어 견문을 넓히는 것을 권한다. 루쉰 자신이  책만 읽는다는 젊은이에게는  사람의 저작만 읽는 것은 여러 방면의 좋은 점을 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가 좋지 않다고 충고한다. 마치 꿀벌이 여러 꽃에서 꿀을 채취하여야 좋은 꿀을 만들어   있듯이.





서구의 인문을 탐구하려면 신화를 공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신화를 모르면 서구 문학과 예술을 이해할 수 없다. 문학과 예술에 어두운 자가 그들 내부의 문명에 대해 무엇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_ 《집외집습유보편集外集拾遺補編》, 〈파악성론破惡聲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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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책에는 입세를 권유하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죽은 사람의 낙관이다. 그런데 외국 책은 퇴폐적이고 염세적일지라도 어쨌거나 산 사람의 퇴폐와 염색이다. 
중국 책을 더 적게 보거나 아예 보지 말고, 외국책을 읽는 편이 좋다. _《화개집》, 〈청년 필독서靑年必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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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배우는 사람이든 과학을 배우는 사람이든 누구나 역사에 관한 간단하고 믿을 만한 책을 봐야 한다. _《차개정잡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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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독자 대중이 연애에 대한 것만 보기 좋아하고 다른 이론은 공부하기 싫어하는데 이것은 대단히 좋지 않은 풍조입니다. 아마 그러한 독서 풍조는 무료하게 소일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_ 1929.04.07 위소연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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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책을 보면 좋겠냐고 물었는데 정말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아이를 위한 책이 많이 나왔지만 나는 아동문학을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본 책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대개는 해롭지 않은 것들이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그야말로 모두 허튼소리뿐입니다. 이후로는 좀 더 유의하여 보면서 좋은 책을 만나면 곧 알리도록 합시다. 그러나 내 생각엔 문학류만 보지 말고 과학에 관한 책(물론 재미있고 알기 쉽게 쓴 것들)이나 여행기 같은 것도 보는 것이 좋다고 여겨집니다. _ 1936.04.02 안여민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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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은 내가 쓴 책만 즐겨본다는데 아마 내가 늘 시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한 사람의 저작만 읽는다면 여러 방면의 좋은 점은 섭취할 수 없으므로 그 결과가 그다지 좋지 못할 것입니다. 꿀벌처럼 여러 가지 꽃에서 꿀을 채집해야 좋은 꿀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만약 한 곳에만 머물러 있다면 얻는 것이 제한되어 무미건조해집니다.

문학 서적만 보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이전의 문학청년들은 흔히 수학이나 물리, 화학, 역사, 지리, 생물학에 싫증을 느끼면서 그런 것을 보잘것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에 가서는 상식마저 없어져, 문학을 연구하는 것은 더 말할 것 없이 글을 쓰려해도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과학은 뒷전에 둔 채 문학만 파고드는 편향에 빠지지 말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세계 여행기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하여 여러 곳의 인정, 풍속과 산물을 알게 됩니다. 당신도 영화를 보는지요? 나는 봅니다. 그러나 그 무슨 <미인을 만났다>나 <보배를 찾았다>와 같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나 남북극에 관한 영화 같은 것을 보기 좋아합니다. 아프리카나 남극, 북극 같은 곳은 직접 가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영화에서나마 얼마간의 식견을 얻자는 겁니다. _ 1936.04.15 안여민에게 보내는 편지




루쉰이 일러주는 글을 쓰는 이유


사람이 적막을 느낄 때 창작은 탄생한다. 마음속이 깨끗할 때 창작은 탄생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창작의 뿌리는 사랑이다.

양주(전국시대 사상가, 극단적 이기주의 주장)에게는 저서가 없다.

창작은 자신의 마음을 적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보는 사람이 있기를 희망한다. 창작은 사회성을 지닌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에게만 보이고 싶을 때도 있다. 친구나 애인에게. _《소잡감小雜感》 



내 글을 솟아난 것이 아니라 짜낸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곤 한다. 듣는 사람은 겸손하다고 오해하고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_ 《화개집 속편華蓋集續編》,  아Q정전의 유래〉 


모든 글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다. 일기조차도 자신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다. 일기도 그러한데 SNS 올리는 글은 자신만 보고자 하는 글이 아니다. 누군가와 소통을 원하거나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달라는 것이다.

가장 치열하게 글을  때는 누군가를 간절하게 원하고 생각할 때이다. 지금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펜을 들어도 좋겠다.

니체는 피로  책을 읽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피로 쓰인 문장이란 아마 없으리라. 글은 어차피 먹으로 쓴다. 피로 쓰인 것은 핏자국일 뿐이다. 핏자국은, 물론 글보다 격정적이고, 보다 직접적이며 간명하긴 하다. 그러나 빛이 바래기 쉽고 지워지기 쉽다. 문학의 힘이 필요한 것은  때문이다.
_〈어떻게  것인가
 
루쉰는 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말하고자 하였다. 그의 생각은 “모든 문예는 선전이다. 그러나 모든 선전은  문예가 아니다.”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시기 중국에서 문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지금은 ‘어떻게  것인가보다 ‘무엇을  것인가  중요하다. 1920년대, 루쉰이 살았던 시기와 다르다. 문학이 필요한 이유보다는 무엇을 쓰고자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문학이 문학으로 가치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은 아마도 평론가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문학가가 되어 글을   없지만, 누구나 글을   있다. 그래서 ‘무엇을  것인가 대한 간절한 고민이 필요하다.


덧_

루쉰, 쉬광핑, 《루쉰의 편지》, 이룸, 2004년 9월 초판 1쇄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 노신 서한집》, 도서출판 창, 1991년 10월 초판 3쇄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노신 산문집》, 도서출판 창, 1994년 11월 16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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