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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Aug 02. 2021

내 가면을 뒤집어쓴 자의 망상일 뿐이다

중국에서 온 편지 _장정일

들어보십시오. 나는 부소입니다. 나는 부소이자, 나는 부소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가면입니다. 그러니 이건 소설도 아니고 평전도 아니고 역사는 더욱 아닐 겁니다. 되기로 한다면 이건 겨우 읽을거리나 될까요?

 

부서는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룬 진시황의 장남이다. 총명하여 아버지로부터 장래를 촉망받았다. 분서갱유를 행하던 아버지 진시황에게 자제해달라고 간언 했다가 분노를 사고 말았다. 이후 흉노족의 국경 감독을 명령받아 몽염과 함께 사실상 벽지로 추방당했다. 진시황이 순행 중에 급사했고 혼란을 피하기 위해 비밀로 부쳐졌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는 부소에게 자결을 명령하는 거짓 황명을 보냈다. 몽염이 이것이 거짓 황명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말렸음에도 부소는 의심하는 것 자체가 도리에 반한다고 말하고 자살했다.


“진시황과 부소의 애증이 군신(君臣) 관계와 부자관계의 양면성에서 나왔다는데 흥미를 느꼈어요. 국가에서의 권력 속성과 가정에서의 부권(父權) 속성을 겹쳐 보이려 했습니다.” (작가의 말)


이야기를 시작하는 “나는 부소입니다”는 그 자신이 부소가 아니라 “부소라 말하는 사람의 가면”을 쓴 장정일이다. 이 소설(이야기)은 1999년 처음 출간되었다. 이때는 1997년 필화(라고 말해도 되는가) 사건, 장편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여론과 문단에 집단 이지메(왕따와는 조금 다르다)를 당하고 있을 때이다. 그래서 ‘나’는 ‘겨우 읽을거리’라 말하고 있다.

 

들어보십시오. 나는 부소입니다. 이제야 나는 내 입으로 부소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건 소설도 아니고 평전도 아니며 역사는 더욱 아닙니다. 이 언설은 다만 내 가면을 뒤집어쓴 자의 망상일 뿐입니다.

 

장정일은 이제야 “나는 부소입니다”라고 말한다. “이제야 내 입으로 부소를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장정일이 말하는) “이 언설은 다만 내 가면을 뒤집어쓴 자의 망상일 뿐”이다. 책 소개는 “진시황의 큰아들 부소의 입을 빌려 장정일이 새롭게 그려내는 진시황 이야기”라고 하지만 진시황 이야기를 빌어 나(부소 = 장정일)의 이야기이다.

 

제국의 중앙집권이 더욱더 강고해지기 위해서는 모든 지식과 사상을 국가가 통제하고 황제가 독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 한비자로 불리게 된 법가 최고의 이론가였던 한비는 일찍부터 사상통제의 필요성을 설파했는데, ... 한비자는 이렇게 썼지요. 현명한 군주가 지배하는 나라에는 죽간이나 목간에 쓰인 문장은 필요치 않다. 법률에 따라서 백성을 교육하면 족하다. 상고의 성인의 말 따위는 필요치 않다. 관리를 백성의 교사로 삼으면 족하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고 그간 불리던 왕王을 무시하고 자신을 황제皇帝라 칭한다. 그가 행했던 “분서갱유책은 통일과 집중이라는 시스템의 원리가 학문과 사상의 영역까지 확대된 논리적 절차”였다. 이에 대해 부소가 아버지 진시황을 변론한다. 장정일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의 독서일기에서 가끔 나오는 보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기차에 두고 내렸다 등으로 표현되는 것과 통하는 것은 아닐는지. 조금 더 지나 그는 자신의 책 제목을 《산 책 읽은 책 버린 책》이라 정하지 않았던가. 부단히 버려야 채울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진시황도 그러한 연유로 분서갱유를 한 것이라니 재미있는 표현이다.

 

아버님의 땅덩어리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고 나의 상상에 의하면 아버님이 세상의 책을 모두 불태운 까닭도 아버님이 이렇게 생각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제국은 너무 좁다. 그러니 제국 내의 책을 모두 불태우면 그 제국이 조금이라도 더 넓어질 것이 아닌가? 방 안의 자질구레한 가구를 재활용 센터에 전화해서 값싸게 들어내고 나면 25평짜리 아파트가 훨씬 넓어 보이는 이치와 같은 거지요.

 

장정일은 ‘작가의 말’에서 《사기》의 여러 가지 판본 중 까치의 그것을 정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사마천에 대한 것은 《사마천의 역사인식》, 《진시황 평전》이 진시황과 진나라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주었다고 적어 놓았다. 이 책의 주제에 대해서는 “내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주제의 한 부분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프레이저의 《황금의 가지》가 대신해 주었다.”라고 한다. 왜 이런 부연을 달았을까? 앞서서도 기술하였듯이 이 책을 쓴 시기에 장정일이 겪었던 일과 무관하지 아닐 것이다.


국가가 인민의 자발적이고 내면적인 복종을 끌어내기 위해 원형감시적인 통치술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사마천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저 예라는 것은 아직 일이 일어나기 전에 금지하는 것이고 법이란 일이 일어난 후에 시행되는 것입니다. 법의 효용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예의 금지하는 도리는 알기 어렵습니다라고 했지요. 사마천은 법이 아닌 예의 원형감시적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거지요. 황제와 승상은 그걸 알지 못했습니다. 유가의 순기능과 유교적 가치를 통치기구 국가의 원리로 빌어온 것은 진제국 이후에 들어선 한제국이지요. 아니, 한제국 이후의 모든 중국의 제국은 백성을 조지는 방법으로 두 번째 방법을 택했고 유교는 중국의 통치이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중국 역사 속에서 진시황 - 이사 시스템의 역사적 아이러니는 바로 이 부분에 있는 거지요. 천하통일을 위해서 유가는 적절치 않았고 법가에 의해서만 통일이 가능했다는 것, 그리고 진제국이 마련해놓은 강력한 법 전통과 안정된 전제정치를 기반으로 문화정책이 꽃피웠던 거지요.

 

120여 쪽의 적은 책이다. 부소를 빌어 ‘내’가 하고 싶은, 한 이야기는 나(장정일)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모든 산물은 작가의 생生과 무관하지 않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장정일이 이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썼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비웃는 문학계가 변하지 않았지만, 작가 자신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덧_하나

장정일, 《중국에서 온 편지》, 작가정신, 2011년 8월 개정판 1쇄


덧_둘

김탁환의 작품 해설 “감각, 관념 그리고 이야기 따로 읽어도 좋다. 데끼리.




감각, 관념 그리고 이야기 _김탁환


서유영(徐有英, 1801~1874)은 《육미당기六美堂記》의 소서小序에서 이 소설의 창작 과정을 소상하게 박히고 있다. 그는 패관기서 여러 편을 읽은 다음 “그 지리번쇄支離煩慶한 것을 덜어내고 신어新語를 보태어” 한 편의 소설을 지은 것이다. 《육미당기》는 신라를 그 공간적 배경으로 택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의 역사소설 가운데 중국을 배경으로 삼은 소설의 창작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소설 한 편을 창작하기 위해 중국을 답사하기는 어렵거니와, 설령 중국을 둘러보고 온다 하더라도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의 광경이나 느낌을 얻어내기는 불가능하다. 하여 이런 모험을 감행하는 작가는 책더미(정보의 홍수)에 파묻혀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책을 읽지 않고는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글을 쓰다가 막힐 경우 더욱더 책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서관에서의 소설 쓰기’에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제약이 따른다. 먼저, 감각의 문제. 인물이나 사건의 얼개는 짤 수 있으나 그 당시의 생활상과 등장인물의 구체적인 삶 자체를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그쪽 생활사나 복식사의 연구서를 참조할 수는 있다. 문제는 그 등장인물인 중국인이 철저하게 중국의 말과 복식과 생활을 취하면 취할수록 그 소설을 읽는 한국의 독자는 독해 불능 상태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애초에 중국인의 대화를 한국어로 상상해서 한글로 적는 것부터가 한국적인 감각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당히 이국적인 냄새는 풍기되, 한국의 독자가 이해하는 수준에서만 이국적이어야 한다. 이런 소설의 등장인물이 중국인과 한국인의 복합이나 절충, 아니면 그 중간의 어정쩡한 상태에 놓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장정일은 이런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묘사를 완전히 배제한다. 《중국에서 온 편지》에 나오는 숱한 인물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정통적인 수법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것은 독자들이, 얘가 어떤 색깔의 무슨 옷을 입었을까? 아침에는 무슨 음식을 먹었을까? 어떤 노래를 무슨 곡조로 불렀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도록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념의 문제. 그 당시 중국 사람처럼 완벽하게 사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하드리이누스의 회상록》을 쓰기 위해 30년 가까이 로마인의 사유를 복원하려고 노력한 자세는 대단히 훌륭하지만, 그녀가 과연 하드리이누스와 그 동료의 사유를 완벽하게 재현하였는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역사적 인물에 들러붙어서 그 인물을 살아 내기가 힘든 것이다. 그런 살아내기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그런 삶이 결국 ‘살아내는 척’할 뿐이라는 결론을 낳는다. 장정일은, 속으로는 그 인물을  살아나는 척하면서 겉으로는 그 인물임에 틀림없다고 우기는 이율배반적인 입장을 취할 바에야, 당당하게 “나는 부소扶蘇입니다. 나는 부소이자, 나는 부소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가면” 일 뿐이라고 말하더라도 이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쪽을 택한다. 이것은 실존 인물에 최대한 근접하기 위해 시간과 품을 들여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 유르스나르류와는 정반대의 자세이다. 실존인물에 동화되려는 노력을 포기한 바로 그 자리에서, 장정일은 실존인물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이런 장광설은 작가와 실존인물 사이의 거리 두기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이제 장정일은 진시황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사마천에서부터 현대의 여러 이론서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두 가지 제약을 벗어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묘사도 없고 관념의 복원도 포기한 자리에 ‘이야기’가 들어선다. 장정일은 조선시대 소설가가 그랬던 것처럼, 진시황에 관한 숱한 책 중에서 그 지리 번쇄한 것을 털어내고 자신만의 새로운 말〔新語)을 첨가하여 하나의 소설(그는 소설이 아니라 단지 읽을거리라 고 했지만)을 만든다. 그가 참조한 것이 어찌 사마천의 《사기》뿐이랴. 이런 글쓰기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텍스트를 얼마나 요령껏 알기 쉽게 읽고 정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렇게 정리해가다 보면, 이하! 역사의 ‘검은 구멍’이 보인다.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구명. 숱한 이야기들이 쌓여 있는 가운데서도 홀로 뻥 뚫린 채 나를 기다린 구멍. 오직 나 만이 채울 수 있는 구멍. 주위가 밝으면 밝을수록 더욱 어두워지는 구멍. 그 구명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는 역사소설을 쓸 수 없다.


《중국에서 온 편지》에서 그 구멍은 ‘부소’이다. 진시황이 유생 460명을 생매장했을 때 유생들을 옹호하다가 북방으로 쫓겨갔고, 진시황이 죽은 후 음모에 휘말 려 자살한 큰아들, 그 아들의 (아들의 가면의 시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시선에서 새로운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온 편지》는 부소의 입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지만, 내게는 자꾸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힌다. 하나는 진시황에 대한 텍스트들 의 정리 작업, 또 하니는 부소의 삶에 관한 작가의 관심. 물론 장정일은 이 둘을 빈틈없이 엮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전자는 지나치게 단정하고 후자는 지나치게 아름답다. 지나치게 아름답다는 것은 장정일의 부소가 흥분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장정일은 부소를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기 위하여, 무서울 정도로 절제한다. 나는 이 두 부분의 차이가 《중국에서 온 편지》의 약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전자가 텍스트와 텍스트의 얽힘이 작가에 의해 정리되는 방식이라면, 후지는 텍스트가 얽혀 있는 곳으로 작가가 또 다른 텍스트가 되어 들어간다는 차이 이리라.


자, 그렇다면, 왜 하필 그 구멍이 ‘부조’ 여야만 하는 것일까? 진시황을 둘러싸고 있는 하고많은 인물 중에 왜 하필 부소인가? 음흉한 노애나 자객 형가 대신 부소를 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이 소설의 중심인물은 ‘부소’가 아니라 ‘진시황’이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장정일은 진시황을 쓴 것이지 부소를 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부소의 가면을 뒤집어씀으로써, 장정일은 진시황의 무엇을 더 부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여기 장정일이 파놓은 하나의 함정이 있다. 장정일은 부소를 택하는 순간부터, 이 문제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살한 아들(카프카의 <판결>)의 전상서에 장정일 자신의 개인적 체험 등등이 겹쳐 추문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고 여긴 것이다 장정일은 은근슬쩍 그런 분위기를 피워 - 진시황과 부소의 갈등, 부소와 몽염의 사랑을 통해 - 정신분석학에 심취한 비평가를 살짝 긴장시켰다가 비웃어버린다(퇴로를 미리 확보하는 차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장정일의 이런 면이 즐겁다. 어차피 소설가는 어느 정도 딴따라가 아니겠는가? 독자가 원하는 걸 보여줄 만큼 보여주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책략!).


그렇다면 왜 부소인가? 장정일은 진시황과 부소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관계라고 거듭 강조하면서도, 그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것만이 아니라면?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장정일은 거대한 통일국가를 ‘군말 없이’ 감당한 진시황과 자기 자신의 욕망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떠벌리는’ 부소를 대비시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삶을 능히 감당하는 자는 말이 없고, 그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쉴 새 없이 지껄여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가(더 나 아가 글을 쓰는 자)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부소가 몽염의 곁으로 가서, “어스름한 달이 떠오르는 것과 함께 집필을 시작합니다. 낮에는 《군주론》을 썼으니 저녁에는 부드러운 달빛같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황금의 가지》를 써야지” 하는 대목에서 나는 더욱 그런 냄새를 맡는다. 눈을 파내는 짓이나 마지막 장면에서 “동이 튼다, 몽염! 어서, 가자, 몽염!”이라고 부르는 것도 삶으로부터 떠난, 어느새 아름다운 이야기 자체에 깊이 침윤된 자의 목소리인 것이다.


장정일의 《중국에서 온 편지》는 이야기(읽을거리)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다. 물론 기존의 역사소설을 읽어 오던 독자는 이렇게까지 자유로워도 되느냐고 의문을 던지리라. 그러나 역사소설을 창작한 경험이 있는 동료로서, 나는 장정일이 결코 이 소설을 가볍고 자유롭게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첨언해두고 싶다. 오히려 적당히 인물을 부풀려 묘사하고, 그 인물 인척 너스레를 떠는 것이 쉬운 일이며, 거기서부터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은, 비록 보기에는 가벼워 보일지라도, 훨씬 힘겹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남는다. 장정일이 수많은 텍스트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진시황에 관한 많은 설명을 했지만, 여전히 진시황은 하나의 추상으로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법가와 도가가 상통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진시황의 폐부를 파고드는 이야기를 장정일은, 아니 나는 정녕 만들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나의 불만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투정일 수도 있다. 김형! 그라는 것도 또 하나의 ‘척’ 일 뿐입니데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벌써 지금까지 진시황을 위해 쌓았던 자신의 도서관을 미련 없이 허물고, 또 다른 도서관을 쌓을 땅을 찾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성큼성큼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짙게 드리운 그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이렇게 외칠 따름이다. 데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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