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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Aug 18. 2021

서양인은 맹자와 《맹자》를 어떻게 생각할까?

맹자는 이름이 가(軻)요 자는 자여(子輿)다. 대략 기원전 372년에서 태어나 기원전 289년에 죽었다. “나이 마흔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不動心)을 지녔다”라고 말한 그는 “천하를 바르게 다스리려 한다면, 지금 시대에 나를 빼고 누가 있겠는가!”라고 호기 있게 외칠 만큼 매우 강건한 기질을 지닌 사상가였다. 그러한 기질은 《맹자》 곳곳에서 진하게 느낄 수 있는데, 이 때문에 공자와는 사뭇 다른 행보를 하였다.


맹자는 “뒤로 수십 대의 수레를 거느렸고, 따르는 자가 수백 명”이었다고 한다. ‘상갓집 개라 불릴 만큼 초라하게 제후를 찾아다녔던 공자와는 사뭇 다르게 맹자는 당당하게 천하를 주유했다. 《맹자》가 직설적이고 때로 거칠게 느껴지는 어조와 논법으로 가득한 것도, 꽤 억지스럽다고 여겨질 만한 주장도 아주 대담하게 펼치고 있는 것도 그런 기질에서 기인한다.


맹자덕을 잃은 황제를 치고 새로이 왕조를 세우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주장한다. 《맹자》에서 나온 부분은 다음과 같다.


맹자가 제선왕齊宣王더러 “왕의 신하 중에 만일 제 처자를 그의 친구에게 맡기고 초나라로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본즉 그의 처자들을 추위에 얼리고 굶주리게 하여 놓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자와는 절교할 것입니다.”

“옥관이 옥졸들을 통솔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자는 파면입니다.”

“나라 구석이 잘 통치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은 곁에 있는 사람 쪽을 돌아보면서 못 들은 척하고 딴 말을 꺼내었다.


제선왕이 묻기를 “탕왕이 걸왕을 내쫓고 무왕이 주왕을 정벌하셨다니 사실인가요?”

“옛 기록에 있습니다.”

“신하로서 그의 주군을 죽였는데 그래도 옳을까요?”

“인(仁)을 깨뜨린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깨뜨린 자를 잔(殘)이라 하는데, 잔적(殘賊)을 일삼는 자는 한 놈의 왈패라고 부릅니다. 한 놈의 왈패 주(紂)를 죽였다고 들었지 그의 주군을 죽였다고는 듣지 않았습니다.”


민심이 곧 천심天心, 민의가 곧 천의天意의 대변한다. 맹자의 역성 혁명론은 민본주의와 직접 연결된다. 민의民意를 기본으로 하는 천명에 혁명의 근거를 두고 있다. 역성혁명은 혁명을 일으키는 주체의 도덕성을 엄격히 요구한다. 탕왕 ·  무왕과 같이 완결된 인격을 가진 사람에 의한 혁명만이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왕면王勉은 “맹자의 말은 아랫사람이 탕 · 무와 같이 어질고, 윗사람이 걸 · 주와 같이 포악해야만 가능한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찬시簒弑의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서양인은 맹자와 《맹자》를 어떻게 생각할까?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 독서 계획》에 나온 공저자 존 S. 메이저의 맹자에 대한 평은 공자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흥미롭다. 공자에 대해서는 “새로운 직업이 필요했고, 찾아 나섰다.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프리랜서 정치 고문으로 출세하려고 했다”라고 평했다. 공자를 ‘프리랜서 정치 고문’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했다는 것과 비교하면 맹자에 대한 평은 사뭇 다르다. 맹자는 “춘추전국시대의 통치자에게 조언을 해주는 방랑 철학자로서 생계를 유지했다”라며 ‘철학자’로 평했다. 둘의 차이가 무엇일까?


맹자를 ‘철학자’로 평한 이유는 맹자의 사상이 계몽사상 지도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 미국인이 《맹자》를 읽어야 할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맹자는 미국 독립 혁명의 아주 먼 조상이다. 17세기에 중국에 파견된 유럽의 제수이트 선교사는 중화제국의 미덕과 절제를 칭송하는 보고서를 본국에 써 보냈다. 중국인이 아주 문명화된 민족이고 그런 만큼 기독교로 개종할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도 피력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제수이트 선교사의 편지는 라이프니츠, 볼테르, 기타 계몽사상의 지도자가 탐독하였다. 특히 볼테르는 중국의 이상적 비전을 이론적 발판으로 삼아 당대의 유럽 통치자를 비판했다. 볼테르의 저작과 다른 자료를 통하여, 백성은 사악한 군주에게 반항할 권리가 있다는 맹자의 사상이 18세기 후반에 유럽의 정치 기상도에 스며들게 되었다. 독립선언서에서 토머스 제퍼슨은 영국 왕 조지 3세가 천명을 잃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건국 문서와 고대 중국 철학자의 명언집이 서로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계몽사상은 이성의 빛을 의미한다

계몽사상을 영어로는 Enlightenment, 독일어로는 Aufklärung, 불어로는 Lumières라고 쓴다. 이는 문자 그대로 ‘밝게 만듦’이나 ‘빛’을 의미하는 낱말이다. 즉 깨게 하는 것, 눈을 뜨게 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사람들이 이런 표현을 쓴 것은 인간의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힘인 ‘이성의 빛’이 무지몽매함과 미신, 종교적 광신, 불합리한 관습이나 전통 같은 어두움으로부터 사람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빛이 지식과 인간의 지혜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계몽이라는 빛은 ‘편견이나 다른 사람의 지도에 의한 왜곡 없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만든 미성숙으로부터 해방’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계몽사상가를 불어로는 philosophes라고 쓰므로 철학자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전문적인 철학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많은 문필가, 교사, 교수, 저널리스트, 예술가 등이 이에 포함된다. 그러니까 계몽사상이란 철학보다는 훨씬 폭이 넓은 대중적인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대학이 아니라 교양 있는 부르주아지나 귀족, 지식인이 모여든 살롱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계몽사상의 특징은 보통 세속성과 합리성으로 말해진다. 18세기 유럽인이 인간 세계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런 가운데 합리성을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몽사상은 서양이 합리적인 근대문화를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미국의 독립이나 프랑스혁명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상운동으로 받아들여진다. 계몽사상이 르네상스와 함께 서양 근대문화의 발전에서 막중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_〈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프레시안


공 · 맹 사상의 영향으로 내용이 낯설지 않다. 여기에 하나 중요한 점은 지금까지 우리는 ‘맹자’의 관점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다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존 S. 메이저는 서양인의 관점에서 다르게 맹자를 보고 있다. “맹자는 공자 학파 중 역사적 중요성이나 명성에서 공자 다음으로 위대한 철학자이다. 공자의 정신적 후계자로서 맹자가 누렸던 특권과 도덕적 권위 덕분에 그는 일국의 왕을 앞에서 모욕을 주었음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맹자》<양혜왕 上>의 첫 장 때문이다. “왕께서도 ‘인仁과 의義만이 있을 따름이니라.’ 그렇게 말씀하실 일이지, 왜 하필 이利라는 것을 내세우십니까?”라며 양혜왕을 면박을 준다. 왕에게 면박을 주는 맹자가 위대한가, 맹자의 면박을 참고 듣는 양혜왕이 뛰어난 왕인가.


덧_

클리프턴 패디먼,《평생 독서 계획》

이을호 역, 《맹자》, 올재

정천구, 《맹자 독설》, 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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