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읽는 목적은 오늘날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파란 눈을 가진 서양인은 공자와 《논어》를 어떻게 생각할까? 한자를 번역한 책을 읽을 것이다. 아니면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중역하여 읽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영어로 된 《논어》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고 설령 기회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뒤집어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가 우리말로 된 것이 아니라 번역되어 우리에게 주어졌다. 공자가 전해주는, 아니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논어》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가끔 우리는 《논어》가 번역서가 아닌 우리 책이라 착각한다. 《논어》보다는 《논어》를 빌어 해석한 책만 넘친다. 길게는 수천 년을 내려온 도덕적 가치관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와 《논어》의 전부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맹자》는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그것을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다고 말했다던 오규 소라이, 1666년에서 1728년 사이에 살았던 이 학자의 발언은 중국과 한자를 타자화하면서 주체성에 눈 뜰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일본어 번역으로 읽을 때 중국인도 모르는 중국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말로 비교언어학적 방법은 ‘일신이생一身二生’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일본 특유의 문화 수용관을 준비했다. _장정일, 《독서일기 5》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 독서 계획》에는 공자와 《논어》에 대한 짧은 평이 있다. 평생 읽어야 할 133명의 저자와 책에 대한 간략한 평을 다룬 책이다. 물론 파란 눈의 서양인 관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공자와 《논어》와는 조금 다르다. 서양인이 우리가 읽고 있는 그들의 ‘고전’에 대한 평을 읽는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를 것이다. 조금 길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를 흔해 빠진 잠언을 말하는 동양의 괴이한 신사 정도로 여기고 있다. 그의 성은 공이고 이름은 구丘이다. 그는 오래된 낮은 귀족 계급 출신이다. 그 계급은 중세 서양식으로 말한다면 기사 계급 혹은 슈발리에 계급이다. 그는 활을 잘 쏘고 전차를 잘 몰았으며 뛰어난 매너와 정력적인 활동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사회적이나 정치적으로 아주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았다. 당시 주나라는 국정 장악력을 잃었고 중국은 서로 싸우는 여러 작은 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의 무예는 점점 불필요하게 되었다. 대규모 보병 부대가 조직되고 신병기가 도입됨으로써, 개인이 무용을 발휘하는 과거 스타일의 전쟁은 쓸모없어졌다.
공자는 새로운 직업이 필요했고 찾아 나섰다.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프리랜서 정치 고문으로 출세하려고 했다. 자신의 역사 지식과 고대 문서에서 발견한 전례를 가지고 새로운 난세에 살아남으려는 통치자를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장 큰 꿈은 소국의 재상이 되어 5백 년 전 주나라가 건립될 때 확립된 도덕적 기준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에서 관리 생활을 잠시 했지만, 자신의 정치 철학을 현실에 적용해 줄 통치자를 만나지 못했다. 지난 1백 세대 동안 동아시아인에게 공자는 교사와 성인의 전범이었고, 역사상 가장 영향력 높은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공자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실패작이었다. 그는 제자의 존경을 받으며 세상을 떠났지만 정작 그 자신은 큰 실망을 맛본 사람이었다.
많은 서양인이 《논어》를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논어》는 그의 대화, 훈시, 사소한 말씀 등을 모아 놓은 책으로, 그의 사망 직후 제자들이 편찬한 것이고, 그 후 여러 세대를 걸쳐 증보되었다. 《논어》는 지속적인 줄거리는 없고 때때로 모호하거나 혼란스러운 문장이 나온다. 어떤 가르침은 너무 자명하여 낡아 보이기까지 한다. 이것은 지난 25세기 동안 자명한 진리가 아주 여러 번 증명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일부 독자는 공자의 보수주의가 못마땅할 것이다. 특히 여성을 저급한 존재로 격하시킨 가부장 제도를 옹호하는 태도에 반발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고대 세계의 모든 사상가가 가부장제를 옹호했다는 사실을 고려하기 바란다.
《논어》는 금방 읽을 수 있는 좀 짧은 책이다. 그래서 재독, 삼독 할 것을 권한다. 이 책은 생생하면서도 관대한 사상의 기록이다.
패디먼의 설명이 서양인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책의 권위를 생각한다면, 일반적인 서양인의 견해라고 해도 좋다. 공자를 설명하는 부분 중에서 “새로운 직업이 필요했고”, “프리랜서 정치 고문으로 출세하려” 했다는 부분은 신선하다. 감히 동양인, 그중에서도 한자문화권에 속한 중국인, 한국인 등은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 서양인의 관점에서는 “공자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실패작”이다. 존경은 받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실패작’이었다는 생각이다.
《논어》에 대해서는 “공자의 대화, 훈시, 사소한 말씀 등을 모아 놓은 책”이며 “줄거리는 없고 때때로 모호하거나 혼란스러운 문장”이라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또한 “어떤 가르침은 너무 자명하여 낡아”보인다. 너무 지당한 말씀이라 우리가 지루한 말에 ‘공자 같은 소리 하고 있네’라고 때때로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들로선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공자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서도 텍스트를 넘어 공자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안 된다. 공자 마음을 이해하려면 공자의 말 한마디를 음미, 또 음미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자가 아파했던 삶의 흔적을 이해해야 한다. 공자처럼 아파보기도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곰삭아 공자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공자의 말도 제대로 해석되는 법이다. 공자의 말만 이해하는 데 주력한다면, 공자의 마음에 이르기란 어렵다. 공자의 말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더라도 공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날의 문제를 공자의 눈으로 바라볼 수도 없다. 고전을 읽는 목적은 결국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는 데 있다. 논어를 읽는 가장 중요한 목적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_이기동, 성균관대학교 교수
공자와 《논어》에 대한 이해는 성균관대 이기동 교수의 말을 빌려 공자와 《논어》를 읽는 목적을 생각하자. 고전이 고전으로서 그 가치를 발휘하려면 읽는 사람의 몫이다. 고전은 늘 그대로 여러 세대를 거쳐 존재했지만, 그것을 읽는 이는 세대마다 생각과 환경이 다르다. “오늘날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는데” 고전을 읽는 목적을 두어야 한다.
중국에서 공자는 권력자가 떠받들었고, 권력가나 권력가가 되려는 사람의 성인이었지, 일반 민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런데 권력가도 공자를 모시는 데에 일시적으로 열심이었을 뿐이다. 공자를 떠받드는 데는 다른 목적이 있어서, 목적이 달성되면 공자 사당은 더 이상 필요 없어지고,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더더욱 필요 없다. _루쉰, <공자와 권력자>
루쉰의 견해는 또 다르다. 뤼쉰이 일찍이 “공자를 떠받드는 데는 다른 목적”이 있다. 목적이 달성 안 되는 공자 사당은 필요치 않다고 했다. 중국은 아직 공자가 필요해서 복권하여 세계화의 기수로 만들고 있다. 우리도 여러가지 이유로 공자를 복원하고 있다.
루쉰은 일찍이 공자는 다른 부류의 성인이라고 했다. 물론 루쉰이 죽고 공자가 복원되었다. 루쉰이 염려한 바로 그 이유로.
유행이다. 인문학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이 《논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이렇게 시작하는 논어의 구절은 한국 사람이면 대다수 알고 있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않느냐’로 해석하고 있다. 공부를 통해 ‘때때로’ 배우고 익힘을 강조하는 말이다. ‘때때로’는 쉼 없이 계속을 의미한다.
온라인 서점에서 논어, 공자를 조회하면 수도 없이 나온다. 이렇게 많은 종류의 책이 나왔는데도 한국 사회가 아직도 이따위라면 책이 팔리지 않았거나 팔렸어도 그저 장식용이고 읽히지 않았을 것이다. 공자가 틀리지 않았다면, 뭐가 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