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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터파머 DataFarmer May 07. 2024

진실하려면~

#2024. 05.05  #worship ##wooridle

"내 마음이 진실하냐"는 질문이 들릴 때, "진실하다"라고 답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대답을 하는 것은 생각할수록 어려운 말이다. 이 질문이 들리는 사람들의 상황에 따라 그 질문의 깊이가 모두 다를 것이다. 진실하다 말하려면 내가 사로잡힌 것을 보고, 보이는 사람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에게도 진실하고, 내 계책을 의존하면 안 된다고 한다. 진실한 삶을 살아보자~



제목 : 네 마음도 진실하냐?

말씀 : 왕하 10:12~19 (김양재 목사님)


예후가 여호나답을 만나자마자 "네 마음이 진실하냐" 묻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바른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진실합니다"라고 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내가 사로잡힌 것을 보아야 합니다.

아합집 아들 60여 명을 처형한 예후는 이스르엘에서 사마리아로 갑니다. 중간에 목자가 양털 깍는 집 휴게소에 들렀습니다. 목자가 묶는 집입니다. 하필 그곳에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어린 이들을 아하시야가 돌보아야 했습니다. 육적인 DNA는 다윗이지만 영적으로는 아합, 이세벨의 DNA입니다. 

예후는 거기서 누구냐 물으니,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이고, 왕자들과 태우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간다고 합니다. 아하시아는 도망을 가도 정원의 집 길로 도망한 것인데, 그 찾은 길은 다윗의 집이 아니라 아합의 집이었습니다. 모두 아합의 집에 묶여 있습니다. 

예후는 바로 '사로잡으라'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하나도 남지 않고 42명이 모두 죽습니다. 고멜의 우상숭배에 죽은 젊은이들의 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아하시야의 조카들은 사로 잡힐 때부터 죽기까지 그 짧은 시간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무언지 처음 경험했을 것입니다. 육이 사로잡힌 사건을 당하면 내가 사로잡힌 것이 무엇이 생각하고 회개해야 하는데, 이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구조에 있어야 구원이 될 텐데, 아합의 집 구족에 사로잡혀 있어서 사로잡힌 순간에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가 없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왕조의 집, 아합의 집, 이세벨의 집의 왕조로 태어난 것이 다윗의 왕조보다 더 자랑스러웠습니다. 

마음이 진실하다는 뜻은 마음이 바르다, 말과 행동으로 나오는 열매가 하나님을 향해 똑바로 서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다윗의 길로 가는 것인데 이와 반대되는 자기만 높이고, 자기 가족만 좋고, 가족 우상, 가족 신화에 빠져있는 굽은 아합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로잡힌 모습을 모르고, 날 때부터 죄인이라 그것을 모릅니다. 거짓말은 어려서부터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하듯,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에 사로 잡힌 채 태어난 것입니다. 이 시대가 그렇게 악합니다. 아합의 집 길이 하나도 남김없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내 영을 묶고 사로잡고 있는 심각한 죄악을 보게 되는 것이, 사건이 왔을 때 보게 됩니다. 아하시야의 가문은 아무도 회개하지 않고, 그들 끼리끼리 모여서 아무도 회개 안 하니 아합의 아들들과 조카들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굽은 길에서 돌이켜 바른길로 오게 하시려고 딱 맞게 주신 환경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악 된 존재라는 볼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적용 질문) 보통 나를 누구라고 소개하나요? 누구라고 소개하고 싶어 하나요? 어떤 상황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내가 보고 인정해야 할 나를 사로잡고 있는 죄악은 무엇인가요?


2. 사람만 아니라 하나님께 진실해야 합니다.

예후가 그다음 우연히 만난 사람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입니다. 미디안의 소생 중 갠 족속 중 레갑 사촌입니다. 이방 출신이지만 모세와 갈렙 가문에 들어간 레갑 가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방인임에도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의 가문이 된 것에 너무나 감사해서 아들들에게 256년을 가르쳐 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택자를 알아보십니다. 

여호나답은 뼈대 있는 집의 선조인데, 평생 포도주를 마시지 마라, 농사짓지 말고 유목민으로 살라, 살 집을 짓지 마라, 구별된 삶을 살라는 가훈을 남겼습니다. 어떻게 이런 영적인 전통을 지켰을까요?

아합 당시 여호나답은 사마리아에 살고 있었는데, 아합이 미친 악한 영향을 보며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을 것입니다. 엘리야와 이세벨의 전투도 보았고, 끊임없는 아합의 악과 온 나라가 바알교로 덮이는 것을 보면서 하박국 선치자처럼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이 악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예후가 등장하여 이 모든 악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라크입니다. 여호나답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아합 집에서 보면 찌질한 여호나답이지만, 예후는 와서 복을 빌어 줍니다. 심판을 한 예후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후의 질문이 중요합니다. 원어로 보면, "네 마음도 진실하냐?"라고 묻고 "내 마음이 네 마음에 진실한 것처럼"이라는 순서로 질문합니다. 

예후는 아합에게 밑바닥부터 훈련을 받아서 장관이 되었는데, 그 아합의 뿌리를 어떻게 끊어 낼 수 있나요? 그 마음속에 악한 것이 있습니다. 예후도 뒷 받침 해주는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여호나답이 속한 레갑 족속은 믿음의 가족이고, 아합을 몰아내고 금송아지 우상을 몰아내고 싶어 하는 영적인 가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후를 통해 "네 마음이 진실하냐" 묻습니다. 그동안 엘리야, 엘리사가 했던 모든 것들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사마리아 자기 집에만 있던 것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주님이 물으시는데, 그것이 여호나답을 새롭게 일깨우는 것입니다.

처절한 회개의 적용이 예레미야 때까지 이어져 그때도 포도주 한 모금도 안 먹었습니다.

그 둘은 서로 시간이 맞아서 잠시 한 편이 되었습니다.

예후가 인생의 정점에 있는데, 그때 나오는 단어가 "나의 열심"이고 그 대상이 "여호와를 위한 열심"입니다. 성경에서 여호와를 향한 "열심"이라는 단어가 예후에게 한번 나오고 엘리야가 사용하였습니다. 엘리야는 하소연하며 가장 낮을 때 그 단어를 사용하며 사명을 감당한 것을 얘기하지만, 예후는 최정점에서 가장 잘 잘하고 있을 때 이야기 합니다. 

여호나답은 스스로 진실하나 고민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후를 통한 "진실하냐"는 질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회개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예후는 자기편을 들어주는 여호나답만 보이고, 이기고 이기는 환경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진실해 보이기는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속이기도 속기도 잠깐 진실한 사람으로 포장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 보았냐?" "믿을 사람 나 밖에 없어"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진실은 무엇입니까? 구제, 참고, 인내.. 이런게 질실인가요? 하나님이 100% 옳으시면 나는 100% 죄인이고, 나는 100% 틀렸구나입니다. 내가 언제나 누구에게 틀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하고, 믿는 사람이 먼저 사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용 질문) 가족과 지체에게 내 마음은 진실 하나요? 하나님을 향하여는 어떤까요? 성공 때문인가요? 구원 때문인가요? 항상 내가 틀렸다고 생각합니까?

목장을 한다는 것은 삶을 다루는 것이라, 수많은 옭고 그름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가치관의 충돌이 있으니, 붙어만 있으면 주님이 각자에게 편지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그렇지만 교회와 목사님에 대해서 비방하는 것에 대해서는 막아야 하지만, 비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구원을 위해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내 계책에 의존하면 안 됩니다.

아합이 아합에 속한 모든 사람을 다 멸하였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이룬 것 같습니다. 아합의 집과 바알은 하나이니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은 예후를 보며 얼마나 두려워하였을까요? 그런데 새로운 임금 같은 예후가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긴다고 모두모두 불러 모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계책입니다.

진실은 바르고, 굽어있지 않은 것인데, 계책은 속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반대입니다. 계책을 쓰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후는 하나님을 향해서 진실하다고 타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알교 척결을 위해 진실하다고 했을 것입니다. 여 호나 납의 목적은 금송하지교, 바알교 척결이었습니다.

아합의 집 심판보다 중요한 바알교 척결을 하면서 한번도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선지자에게 물었다고 한 것이 없습니다. 예후는 자기가 전쟁과 작전에 일인자라서 계책을 세운 것입니다. 이번 계책도 제1회 바알교 부흥회입니다. 모두를 다 모으는 것입니다.

열심의 최고봉 예후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진실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데 하나님께 묻지도, 찾지도 않습니다. 모두 나를 향한 열심이고, 이 열심의 끝이 속임수입니다. 욕심을 열녀 삼아 붙태우는 이것은 결국 속임수로 끝나는 것입니다.

여호나답은 그런데 왜 동참할까요? 하지만 그도 겪어야 할 게 있기 때문입니다. 바알교 척결이란 목적이 좋기 때문에 수단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묻고 내 계책에 의지하지 않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전을 의지하지 않고, 공동체에 묻고 가야 합니다. 무엇을 이런 것을 물어? 하는 것이 영적으로 좀 먹는 것입니다. 

내 열심히 아닌 진실성으로 갈 때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전장치입니다. 

(적용 질문) 계책이 통해 좋아했던 일은? 아직도 자랑스러운가요? 부끄러운 가요? 반대로 계책이 막혀 회개한 일은? 내 열심과 계책을 놓고 목장에 물으며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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