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7.07 #worship ##wooridle
1. 민음의 어머니가 중요합니다.
요아스는 자기 아버지 아하시야, 아합을 죽인 예후로 힘입어 뒤이어 요아스가 왕이 된 것입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무서울 것이지만 그가 40년간 통치했습니다. 요아스는 고아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품에 안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고아 중에서 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찐 고아였습니다. 그는 친가 할머니에게 죽을 뻔했기에 숨어서 자라야 했습니다.
불우한 환경 때문에 요아스가 가장 중요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욕심으로 갖고 싶은 맛단 같은 것이 아니라 진짜 선물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죽이려 해도, 할머니가 죽이려 해도 그 가운데 예수씨를 보면 진짜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딱 맞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를 주 안에서 해석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요아스의 어머니 이름이 나옵니다. 어머니 시비아는 순한 사슴이란 뜻이고, 믿음의 여인입니다. 요아스는 침실에 강금되어 살았기에 시비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시비아는 믿음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시비아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지만 믿음의 어머니였습니다.
여호야다의 이름이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뜻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십니다. 요아스가 악을 행했는지 당했는지 하나닙은 다 아십니다. 기가 막힌 상처를 받은 분들이 하나님이 후대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목사님의 어머니도 믿음으로 사셨기에 저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부모가 어떤 사람이든 믿음을 주셨으면 최고의 부모입니다. 믿음의 계보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왜 중요하냐면 영향을 크게 미치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중요합니다. 내가 예수 믿게 하는 어머니, 부모님이 최고의 부모입니다.
(적용 질문) 여러분의 어머니가 세상적으로 좋은 분입니까? 나쁜 분입니까? 어머니가 잘해주셔서, 또는 방치로 주님을 만났습니까? 예배하고 큐티하고 목장 나가면 최고의 어머니인 것이 믿어지세요?
2. 교훈하는 동안에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제사장의 대표 여호야다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왕이 아님에도 왕의 묘실에 묻힙니다. 요하스가 여호야다의 교훈을 잘 받았기에 제사장 직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구속사의 교훈을 잘 받아서 목사직이 중요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요아스를 살리고, 왕이 되게 했을 뿐 아니라 교훈했습니다 (토라). 인간의 경험과 지식이 아닌 율법으로, 하니님의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유다와 북이스라엘 40여 명의 왕 중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은 자는 요아스 밖에 없습니다.
출애굽 후에 교훈을 받으며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사무엘이 왕을 구하지 말라했지만 다른 나라에 왕이 있으니 왕을 구했고, 끝이 없이 왕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분노와 진노로 왕을 주셨다고 합니다 (호세아). 우리가 세상적인 왕을 구하는데, 왕은 그 위칭에서 말씀으로 교훈을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 입니다. 요아스 정도 되어야 말씀이 들리고, 말씀으로 교훈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를 하나님께 인도받지 않고, 하나님의 교훈을 받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 믿어도 자식들과 말이 통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효도하면 말이 통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효와 믿음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코란이 중요하기에 미국과의 전쟁이 중요하지 않고 불교에서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 중요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입니다.
교훈을 받는 비결은 예수씨를 이어가시려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 적이지만, 구속서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41명의 왕 중에 부모에 대한 기억조차 없는 왕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요아스는 왕실의 보호도 전혀 받지 못했고, 성전 골방에 숨어서 고모부와 여호야다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했던 것입니다. 환경이 최고의 복입니다. 찐 고아라는 비참한 상황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통로였고, 그곳에서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았던 것입니다. 말씀으로 고난을 받으니 고난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에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다스렸습니다. 사람이 깊어지는 것은 묵상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질문) 나는 이것 때문에 어쩔 수 없어라고 탓하는 원망은 무엇입니까? 지금이라도 누군가 살아있는 동안에 교훈을 받고자 결단하실 수 있겠습니까? 실제적으로 각종 양육훈련을 받으시겠습니까?
3. 여전히 산당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교훈을 받고 여호와 보시기 정직히 행하였지만 여전히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고, 이것이 요아스의 결론입니다. 백성들이 산당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잘 자라 예후처럼 능력자가 되었든, 요아스처럼 붕루한 환경에서 자라서 왕이 되었든 여호와께 충성하기가 어렵고, 자기 산당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가 쓰는 것은 그 사람의 정치를 잘하고, 힘이 있어도 하나님의 힘으로 한 것만 기록이 됩니다. 요아스의 40년 기록에 산당 예배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기록된 것입니다. 산당을 제거하지 않기 때문에 지도자로서 아무리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해 백성들이 다 따라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하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큐티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부모를 보고 아이들이 다 따라 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 세대주가 정말 중요합니다. 입으로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유다에게 다윗의 등불을 허락해서 약하게 해 주셨습니다. 성경의 지면에 많이 할애된 이전의 세 왕들의 15년 기록은 많이 기록되었지만, 요아스의 40년에 비하면 아주 짧은 것입니다. 사탄과의 전쟁은 아주 짧더라도 이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죄와 남유다의 산당은 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간증하고 눈물 흘리면서도 못 떠나는 죄가 있습니다. 연약해서 분별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산당 예배를 드리는 유다 왕들은 그럼에도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갔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음악, 기계, 기술 발명으로 그 성과가 많지만, 셋의 후손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밖에 기록이 되지 않았던 아주 심플한 삶을 살은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유다 왕들이 심플하게 살던 어느 날 가인의 후예들이 에덴 동편 놋땅에서 가인의 후손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자꾸 부러워하는 것이 산당 예배입니다.
유다는 솔로몬부터 25년 성전 열심히 짓다가 15년 타락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타락했으나, 남유다는 다릅니다. 여로보암의 길은 영원히 망했고, 예수씨를 떠나 세운 북이스라엘이기에 능력대로 되는 나라입니다. 능력대로 살면 이혼도 몇 번 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능력대로 일꾼을 뽑습니다. 지금도 개혁의 아이콘 예후가 7살 요아스는 비교가 안됩니다. 여러분은 예후를 따르겠어요? 7살 요아스를 따르겠어요?
남편의 질서를 안 세우는 집은 아이들에게 좋지 않습니다. 질서를 잘 세우려면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영원히 지구상에서 없어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연약해도 남유다는 한 번도 정권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볼 때에도, 결혼상대를 볼 때에도 예수씨를 봐야 합니다.
믿음의 어머니와 아내가 질서를 잘 지키면 그 가정에 영적인 후사가 나옵니다. 능력을 보여주기는 쉽지만, 그렇지 못할 때 십자가를 보여주는 것이 지혜입니다. 능력 없는 사람이 인정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은혜라는 말을 쓸 수 있는 나라입니다.
사당은 높은 상에 세운 곳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던 기본 산당이었습니다. 다윗도 그 산당을 폐하지 못했습니다. 남유다에서 내가 원하는 방식, 때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산당 예배입니다. 그 바탕은 우상에서 비나이다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산다예배는 뿌리 깊은 기복 신앙인데, 우리도 기도하면서도 이게 기복인지 팔복인지 구별은 하기가 어렵습니다. 말씀 묵상하고 적용하면서 조금씩 깨달아지고 죄를 제거하는 것이고, 인생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이고 예수님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 질문) 예배에 은혜를 받음에도 끊임없이 바라는 기복의 산당 예배를 얼마나 좋아하시나요? 입시 입사, 건강 물질 등에서 끊지 못하는 산당 예배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