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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터파머 DataFarmer Dec 26. 2019

독서노트_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때

12월 3주~5주 (고든 맥도널드 저 | IVP | 2001.05.05)

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때
 

서평 및 발제

   1999년 ~ 2002년 한창 IVP 책을 샀고, 신앙서적을 많이 사서 볼 때다. 그때는 책을 통해 앞날을 그려볼 수 있었고, 어떠한 가치관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동일 저자의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라는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깨달음과 감격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에 새기어져 있다.


   2019년 마지막 12월을 보내면서 한해의 일들을 되돌아본다. 5월에 태어난  새 생명 귀한 아들, 10월 직장의 변화와 더불어 관계의 변화가 생겼고, 새 업무에 대한 막연함이 있었지만 진행하면서 만족과 성장과 성취가 생겨났고, 주거지의 변화가 있었고, 무엇보다 12월 아들이 유아세례를 받으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간증을 했고... 올 한해 교회, 목장, 직장, 가정 모든 영역에서 인생의 중간 궤도가 수정되었다. 열심히 사는 것보다 중요한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항로를 변경하게 되었다. 성장할 여지가 있다는 깨달음과 인성과 지성과 성품과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고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게 되고 변화된 것이다.


   중간 궤도의 수정은 떠남으로부터 시작된다. 30대를 떠나 40대가 되었고, 전 직장을 떠나 새로운 직장으로 가게 되었고, 광야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청년 시절에는 '떠남'이라는 단어가 좋았다. 그래서 정말 많이 떠나온 것 같다(회피 본능). 하지만 지금 내게 '떠남'이라는 의미에 역설적이지만 '안착'에 무게를 두게 된다. 떠남으로 일어나길 기대했던 변화들이 시작되어 내 삶에 안착이 되어야 하고, 회피와 탈출이 아닌 직면과 안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궤도를 바꾸어서 방향을 정했다면 이제 그 목적지로 나아가야 하고 안착해야 하는 것이다. 그 변화는 하루아침의 변화가 아닌 오랜 기간 동안 느리고도 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중간중간 많은 질문이 나온다. 빨리 책을 읽어나가려는 마음과 질문의 답하며 사색에 잠기려는 마음 두 가지가 갈등하며 책을 읽어왔다. 마치 내 삶처럼 말이다.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고민하며 항로가 정해졌음에도 비교와 갈등하며 집중하지 못한 사람처럼 말이다. 이제는 궤도가 정해졌고, 목적지가 정해졌으니 그 방향으로, 그 목적에 집중하며 살 것이다. 이제는 그 시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신뢰해본다. 떠남이 순종이었다면 목적지로 기꺼이 향하는 것인 신뢰인데, 그 신뢰를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40년 광야생활을 이제 떠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도 있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위한 시험도 정리해보고 싶다.



독서노트 (요약)  


서론

생생한 낙관론 (vital optimism) : 어떤 공동체나 사람이 장차 최상의 것이 도래하리라고 확신하는 정신상태를 묘사하는 단어.

사십이 넘은 남자들/ 한밤중에 일어나서/
도시의 불빛을 쳐다보고는/ 인생이 왜 그리도 긴지 의아해하고/ 어디서 길을 잘못 들어섰는지 생각한다[시인 에드 시스맨]  

In the middle of the journey of our life I came to myself within a dark wood where the straight way was lost.
Ah, how hard a thing it is to tell what a wild, and rough, and stubborn wood this was, which in my thought renews the fear!” [Dante Alighieri]


제1부 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때

"휴스턴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폴로 13호 짐 로벨]

문제에 봉착할 때 삶이 변화될 수 있고, 변화되어야 하며, 전적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제1장 똑바른 길을 따라서

우리의(나의) 인생 여정 한복판에서
나는 캄캄한 숲 속에서 나의 감각을 되찾았는데, 
내가 똑바른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단테 신곡 중에서]

단테의 신곡에서 진짜 문제는 단테 자신이다. 생생한 낙관론이 사라져 가고 있다. "나는 캄캄한 숲 속에서 나의 감각을 되찾았는데" 라는 말은 개인적인 자각 같은 것을 묘사한다. 즉 눈이 열려 잊어버렸던 것이나 이전에는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는 경험이다. 작가 자신이 인생을 다시 정돈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존재 내면에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음이 분명했다. 수가 사람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그녀를 쫓아 그분이 계신 곳으로 갈 정도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들은 그녀와 함께 그분의 존전에서 생생한 낙관론을 소생시키는 삶의 변화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들은 후에 "우리는 이 사람이 진정 누구인지 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가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요 4:12-42)

사람들이 자기 감각을 되찾게 되는 순간, 즉 캄캄한 숲을 경험하는 순간들을 알고 있다. 이런 일은 세 가지 일반적인 조건에서 일어난다.

1. 개인적인 와해 : 인생이 파괴적인 선택으로 초래된 엄청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채 와해되어 비명소리와 함께 중단되는 것이다.

2. 개인적인 실망 : 삶의 주요 영역을 보면서 우리가 시작했을 때 기대했던 것에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때다.

3. 긍정적 불만족 : 인격이 더 깊어질 수 있고, 지성이 더 연마될 수 있으며, 대인 관계는 더 고상한 수준으로 격상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의 폭도 더 넓어질 수 있다. 성장할 여지가 있다는 깨달음, 즉 깊이와 넓이 혹은 길이에서 더 뻗어 나갈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바울의 생애 최후의 시기에 '나는 그리스도를 매우 친밀하게 알고 싶어서 그분의 고난과 그분의 죽음과 그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삶의 구조가 와해되든지, 여러 가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실망에 빠지든지, 삶의 질을 높여야 되겠다는 진정한 충동을 느끼든지 간에 우리가 캄캄한 숲에 처한다면 단체처럼 우리의 감각을 되찾게 된다.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그 같은 중간 궤도 수정이다. (변혁, 변화, 회항)


제2장 우리를 회심시키는 말씀

어떤 서평의 한 구절에, 한 편의 시를 가리키면서 "그 시는 가슴에 꽂혀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말 중에서 예수님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그들의 가슴을 찌른 말씀, 그리고 그 위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분이 말씀하신 내용과 방식은 온갖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분은 영혼을 동요 시키는 촉진자 이시어 사람들이 인생의 중간 궤도 수정을 고려하게끔 자극하셨다.

인생을 재정리할 필요가 있는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

1. 방관자 : 근본적으로 필요에 따라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그분의 근처에 서성이는 사람이다. 하지만 방관자가 항상 근처에 있었던 이유는 그들 자신이 영적으로 공허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생생한 낙관론 따위는 상실한 채로... 무명으로 머물러 있으며 부담이 되는 것은 수용하지 않으려 하고, 받는 것만 있지 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방관자가 진정으로 경청해서 말씀이 영혼 깊숙한 곳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경우에는 다음 단계로 전진할 수 있다.

2. 구도자 :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신 표적일 보았기 때문에 그분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 다닌다. 그분은 삶의 변화가 무엇을 감수케 하는지 깊이 깨닫도록 요구하신 것이다. 구도자의 특징은 호기심이다. 질문을 던지고 모든 것을 눈여겨보며 그분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잠정적인 발걸음을 내딛는다. 방관자와 다른 점은 삶의 변화를 결단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3. 추종자 : 방관자 -> 구도자 -> 추종자가 되는 자는 소수다. 이 전환은 모든 중간 궤도 수정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이 기뻐하는 것은 최초의 변혁이라고 말한다. 이 변화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중간궤도 수정을 통하여 우리를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 세대를 섬기는 종으로 삼는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4. 왕국 건설자 : 이들이 깨달은 통찰은 그들의 믿음은 겸손과 생생한 낙관론,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 영적 공동체에 대한 가족 같은 헌신, 세상에서 종과 같이 활동하는 것을 특징으로 빛난다. 

당신의 생활에서 한 단계 전진하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당신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이 가슴에 닿아 무성하게 자랄 때 이루어질 것이다.


제3장. 진정한 변화

간증이란 자신이 어떻게 인생에서 최초로 중간 궤도를 수정해서 개인적인 믿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믿음을 갖기 전 캄캄한 숲에 처했던 삶에 대한 묘사, 믿음의 똑바른 길로 오게 된 과정에 대한 묘사, 끝으로 그 결과가 어떤 변화로 일어났는지에 대한 인식이다. 


제4장. 자기 수양인가, 변혁인가?

"수년전 나는 그들의 가장 치사하고 이해하기 힘든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려던 그들의 열심은 그들이 스스로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이 책은 삶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질은 표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이다. 영혼의 차원에서 영적인 문제를 다루라. 그러면 성품과 관계의 문제들이 가담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숨겨진 이란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 남이 인정해 주지 않는 것,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을 지정한다. 우리가 가장 만족스럽고 가장 영구적인 중간 궤도 수정을 발견하는 때는 바로 숨겨진 것을 마주할 때다.

숨겨진 것의 첫 번째는 하나님의 목적이다. 모두 숨겨져 있지는 않지만 하늘에만 알려진 실재와 의도를 우리가 알려면 계시가 있어야 한다 (hidden will of God). 여러분은 숨겨진 목적을 갖고 계신 그분을 신뢰하고, 사태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분 자신이 하시는 일을 정확이 알고 계시다고 믿을 것인가?? 오직 그분만 아시는 목적 속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고 언젠가 그것이 밝혀질 것이라는 가능성을 서서히 생각하게 되었다. 아브라함도 스스로를 바꿀 수 없었지만 그분은 그러실 수 있었다.


제2부 떠나라는 부르심과 함께 시작하라.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창 12:1-2)


제5장 신앙 여정을 거꾸로 따라가면

지난 인생의 발자국을 거꾸로 추적해서 지금 여기까지 이르게 만든 모든 중요한 생각과 선택을 점검할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나는 우리가 중간 궤도 수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리라고 장담한다. 좋은 것과 별로 좋지 않은 것 모두로부터...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 흔적을 잘 설명해준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출발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는 왜 그 산꼭대기에서 그의 아들, 외아들 이삭과 함께 있었는지를...

이 순간이 이르기까지는 100년, 곧 내가 경험해보지도 못한 10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아브라함이란 남자는 하날의 음성 한마디를 듣기 시작했고, 그 말은 그의 가슴속 깊이 파묻혀 무성하게 자랐다. 그들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깊은 고통을 나누는 관계였을지 모르겠다. 훈련되지 않은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숨은 목적이 진행되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신중하게 입을 다물고 눈여겨 관찰하는 편이 낫겠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에게 행동으로 옮기려는 그 순간, 하늘로 부터 "아브라함아" 하는 음성이 들려왔고, 계속하여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내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이제라니, 마치 이 순간 전에는 아브라함이 그분을 두려워했다는 것이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다는 듯이.. 내가 이제 알았다라니.. 이 순간이 도달하기까지는 100년이란 세월이 걸린 것이다. 내가, 이제, 알았다. 아브라함은 이 세 단어 중 어느 것을 들었을까?

며칠 전 아브라함은 "너의 아들, 네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라는 음성이 들렸고 그는 어떤 지체도, 반항도, 협상도 없이 그냥 길을 떠났다. 너무 쉽게?? 단순하게?? 하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이 오랜 세월 동안 이 음성을 경청해 왔다는 사실과, 그 음성이 완전히 믿을 만함을 고생스럽게 터득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명령이 어려운 것인 만큼이나 그 사람은 평생에 걸쳐 단순하게 순종하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대체 무엇을 위한 시험??? 바로 순종과 신뢰하는 그의 능력,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시험한다.

모리아의 한 산에 있었던 며칠 동안 아브라함의 믿음은 세 가지 면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1. 아브라함이 그 음성에 순종하는 법을 배웠다는 은근한 증거가 있다.
    그는 상당한 기간에 걸쳐 경청하는 기술을 익혔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을 배웠고 적절한 반응을 배웠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처럼 40년이나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운 다음에야 다시 행동의 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처럼... 모리아 땅으로 가라는 음성이 들리자마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은 인물은 여정을 시작했던 과거의 인물과는 매우 판이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으로 길을 떠난다. 이 상황에서 순종이 따른다. 맹목적 순종?? 아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오랜 세월 동안 그분의 숨은 목적, 다른 이들에게 항상 밝혀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에게도 밝혀지지 않은 때라고, 그 숨은 목적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결과 형성된 더 깊은 순종이다. 

2. 산을 오르는 그 사람은 또한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아들아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실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그 아들은 아버지를 신뢰한다. 그 아버지는 하늘의 아버지를 신뢰한다. 무엇인가 깊고도 변혁적인 일이 지난 100년의 생애 동안 일어났다. 아브라함은 완전한 신뢰의 정점에 도달한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신랄하게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진지하다. 하나님은 마련해 주실 것이다. 과거에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은 여러 번에 걸쳐 되풀이되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를 통하여 광야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자손이 그 족장을 축복할 것이다. 이것이 신뢰다.

3. 그는 그 아들 이삭이 그의 것이 아님을 배웠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중 가장 잔혹한 아버지가 자기 아이를 죽이려는 장면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는 도대체 왜 이런 짓을 기꺼이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이삭이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삶에서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 아이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의 소유가 아니다. 이 아들은 하나님의 것이다.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은 오랜 세월에 걸친 것이다. 우리가 중간 궤도 수정의 속성을 가장 심오한 차원에서 이해하려면 그 여정을 거슬러 올라가 그를 이런 인물로 만든 배경을 살펴야 한다. 아브라함의 번혁이야말로 21세기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최상의 신앙 모델이요, 성경에 나오는 다른 어떤 인물의 경우보다 유익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제6장 어린 시절의 게임처럼

항상 배우면서, 항상 자라면서 진행된 아브람의 개인적인 변혁은 분명히 느리고도 오랜 과정, 우리 대부분이 직면하는 중간 수정의 특징이다. 당시에나 오늘날에나 하룻밤 사이의 변화란 없는 법이다.

아브람에게는 본토를 떠나고, 네 족속을 떠나고, 아버지의 집안을 떠나야 했다. 

중간궤도 수정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때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은 정말 확실히 떠낫는가? 이다.

아브람이 떠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고 놀라지 말라. 하지는 그는 마침내 떠났다.

여정의 목적지는 아브람에게 하나의 신비였다.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는 상당히 막연한 계획이다. 만약 떠나는 것이 순종의 행위라면, 마지막 목적지로 가까이 향하는 것은 신뢰의 행동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분깃으로 받을 땅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마치 타국에서와 같이 약속의 땅에서 거류하며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결국 떠난다는 것은 친숙한 것과 안전한 것을 버린다는 말이다.

인생에서 배운 것은 큰 떠남(Leaving)과 작은 떠남(leaving)이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개인적인 선언으로서, 과거에 나를 붙잡고 있던 것으로부터 자신을 풀어놓겠다는 것이다. 후자는 날마다 하는 선언으로서, 영혼을 할퀴고 하나님의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에서 나를 풀어놓겠다는 것이다.


제7장 안개속으로

아브람은 그 땅을 지나서..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라는 말씀이 들렸다. 이에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창12:6-7)

아브람의 대각성을 위해 그가 직면한 5가지 시험 중 세 가지

1. 첫번째 시험 : 자기 보존
   아브람은 기근이 심해 이집트로 갔고 바로의 궁전에서 그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고, 이에 양떼와 소떼와 암나귀가 수나귀와 남녀 종과 낙타까지 얻었다. 아브람이 믿음의 여정을 가려면 먼저 자기 보존이라는 자연적인 본능을 다루어야 했다. 여정을 가다 보니 아브람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달했지만 심한 기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구나 사라에게 누이라고 거짓말 하게하고, 그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창 12:12-13). 처음에는 좋아할 만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그가, 알고보니 도덕적인 견지에서 겁쟁이로 판명 났다. 사태가 위험하다 싶으면 순간적으로 자기부터 먼저 살고 봐야겠다는 본능이 발동되는 인간이었다.

2. 두번째 시험 : 사업상의 결정
   아브람의 삶의 변화 중 두번째 시험은 롯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너와 나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된다...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창13:6-9)". 롯은 사업상 이익인 넉넉한 들판을 선택했고, 하나님은 즉시 아브람에게 그의 이익은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순간부터 아브람은 하나님을 조금 더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 후 롯은 항상 곤경에 처하는 반면, 아브람은 점점 강해진다.

3. 세번째 시험 : 관대함과 안전
   롯과 그 가족은 소돔에 살고 있다가 습격을 받아 포로로 잡혀 들어가 살 소망이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돔과 그 왕의 몰락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군사들과 기술자들을 모아 추격한 끝에 롯과 그의 재산 그리고 소돔 성 전역에서 빼앗긴 전리품을 되찾는다. 이후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주었다. 그런데 소돔 왕에게는 받기를 거절한다. 아브람은 "소돔왕 그대 덕분에 아브람이 부자가 되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습니다"(창 14:22-24).
  아브람은 지출한 비용 이상의 것은 받지 않는 기준선이 생겼다. 무엇인가 배운 것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삶의 중심이 그 음성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께 맞추어 조율되어야 함을 배우고 있다. 그는 약속의 땅에 머물면서 더 이상 그 땅 사람들과 변덕과 적대감에 좌우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만이 그를 지탱하실 것이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8장 신뢰하는 법 배우기

사래는 임신을 못하여서 자식이 없었다(창 11:30). 하지만 창세기 15장은 아브람과 그가 막 신뢰하기 시작한 하늘의 음성과의 친밀한 대화를 소개하고 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크다. (사업상이 전부가 아니다)

그 음성은 바닷가의 모래만큼 그리고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후손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약속하신 것이다. 이전에 아브람이 가나안에 머무는 것으로 시험을 받았다면 (실패했음), 그의 목숨 부지를 위해 사래와 짜고 그녀를 누이로 둘러대는 시험을 받았다면 (실패했음), 또한 멜기세덱에게는 주고 소돔 왕에게는 돈을 받지 않는 것으로 시험받았다면 (성공), 이제는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큰 시험을 받고 있다. 

아브람의 대각성을 위해 그가 직면한 5가지 시험 중 나머지 두 가지

4. 네번째 시험 : 아들을 얻기 위한 노력
   고대의 남자에게 자식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중요했다. 상속자는 가문의 부를 이어받을 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가문의 정신을 수호하는 자가 될 것이다. 고대인들 대부분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느끼는 친밀감은 남편/아내 간의 친밀감보다 설사 크지는 않을지 모르나 대등한 정도였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는 보았고", "내가 하는 일은 곧 아버지의 일이니라" 등 의 진술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에 걸쳐 부자간의 친밀함을 표현한 진술이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는 자기와 '하나'가 될 아들, 남성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집안의 사업을 함께할 아들이 없었다. 아직 아브람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준 '네 자손이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는 말은 좋아했지만 그것을 이루실 수 있다는 믿음이 부족했다. 결국 오랜 관습을 따라 엘리에셀을 공식적인 상속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네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상속자'라고 그 음성은 말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아들을 낳지 못하여, 하갈이라는 이집트 사람 여종으로부터 이스마엘을 얻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는 모든 이가 패자다. 사래의 손에 넘어간 하갈은 심한 구박을 받은 나머지 멀리 달아났다가 천사의 권면에 의해 겨우 돌아오지만 이미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 큰 실수를 저지를 시기는 아브람이 86세 때였다.

13년이 지난 후 하늘에서는 아브람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면에서 충분한 훈련을 받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의 나이 99세였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창17:1-2) 

아브람은 이 말씀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고 썼다. 완전한 복종의 자세,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을 어렵게 배운 사람의 모습이다. 이 순간까지 무려 3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이제 그의 이름은 존경받는 자라는 아브람에서 수많은 백성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으로 바뀔 것이다.

사라가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고, 백성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녀에게서 나오게 하겠다 (창17:16)

아브라함은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나이 백살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90살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한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창 17:17)

이 흠모할 만한 남자가 아직도 의심하고 실제로 웃으면서 자기가 전능한 하나님보다 더 잘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가? 그리고 그런 불경스러운 아브라함을 끝까지 인내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친절하신 분인가! 

이야기가 마친 후 아브라함은 다음날 온 집안사람으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한다. 이는 그의 집안이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며, 영적인 각정이 완전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수메르와 연관된 모든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였고, 자신이 누구를 신뢰하는지 알았고, 앞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 것이다. 그 남자는 참으로 떠난 것이다. 생생한 낙관론, 곧 하나님의 숨은 목적에 대해 소망을 품기 시작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숨은 목적'을 지닌 하나님의 인도 아래 앞으로 나아가지만, 롯은 망각의 터널로 향한다. 수메르를 떠났을지 모르나 영적으로는 결코 떠나지 못한 사람의 발자취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곳의 문화 풍습과 방식을 따랐다. 잘못된 선택에 따른 결과도 맛보게 된다.

5. 다섯번째 시험 : 실패
   믿기지 않지만 아브라함은 다시 한번 '사라는 나의 누이' 이야기를 재현하려 한다. 그 많은 사건을 겪고 나서 창세기 20장에 와서 아비멜렉 왕과 마주할 때 90세가 넘은 자기 아내를 또 누이라고 둘러댔는지 해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사람이 믿음의 여정에서 아무리 멀리, 아무리 깊이, 아무리 높이 나갔다 하더라도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믿음엔 정말 되었다 함이 없다) 
   아브라함은 빙하 위에 있다. 계속해서 그 음성에 귀 기울일 것인가, 아니면 본능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인생의 변화의 길이 세월이 흐르면서 더 쉬워지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이다. 답은 '아니오'다. 삶의 변화는 갈수록 쉬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와 의문이 커질수록 더 어려워질 것이다. 초창기에는 중간 궤도 수정에 습관의 변화, 성격의 적응, 평판 쌓기, 관계의 질 등이 포함되었다. 그 후로 문제가 되는 것은 죽음, 장애, 통제권을 내어 놓는 것,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제9장 믿음의 상처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던 해에 사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에게 아버지가 되는 영광은 안겨 주었다.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셨다. 

종교적 영웅들이 완벽한 수준에 도달하기를 바라지만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과거나 현재나 사람들을 영광스러운 지위로 떠 만드는 것은, 당사자에게나 우리 자신에게나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깨어진 존재로 태어났으며 일평생 그런 상태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우리가 소망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믿음의 여정을 살아가는 동안 날마다 삶의 변화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왜냐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자 애쓰는 모든 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중간 궤도 수정 : 증거

이 사람은 수메르를 떠나라 했을 때 순종을 배웠다. 그리고 다섯 가지 시험을 통해서 신뢰를 배웠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생애 중 마지막 장은 이런 일이 있는지 얼마 뒤에 또 다른 시험이 시작한다. 이 시험은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시험이다.

이 이야기의 깊이와 넓이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 사람은 챔피언이다. 떠나는 용기, 때때로 내린 (또는 내리지 않은) 어려운 결정, 의심과 염려, 산으로 오르기 전날 밤 그의 영혼을 엄습했을 어두움. 그러나 그의 중간궤도 수정은 진짜고, 견고하고 깊고 넓고 검증된 것이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믿음에는 상처가 있다. 고향을 떠나면서 생긴 상처들, 자녀 생산의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하다가 생긴 상처들, 롯과 헤어지기로 결정할 때, 소돔 왕의 보상을 거절하기로 결정할 때, 아내를 누이로 속일 때 생긴 상처들이다. 그리고 궁극적인 제물을 바치러 산꼭대기로 올라가던 중에 생긴 상처들도 있다.

궁극적으로 상처는 있지만 의심은 없다. 그리고 믿음, 순종, 신뢰가 남았다.





    


참조 : 구글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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