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K Jan 08. 2021

<화차>

증발


고향에 대해

경기도에서 19년을 보냈지만, 애정이랄 것이 없다. 크지 않은 수도권 변두리 도시에서 자라면서 도시에 대해 아는 거라곤 비옥한 땅 덕분에 쌀이 많이 난다는 것, 제법 큰 항구가 있어 큰 컨테이너들을 볼 수 있다는 점 뿐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서울에 올라왔고 나는 진짜 고향과는 거리를 두고 서울을 고향처럼 생각했다.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이 '원래 집이 어디야'라고 물으면 '그냥 서울 사람'이라고 답할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고향 이야기를 하면 할 말이 없어서, 차라리 시골 동네에서 소를 길렀다거나 개울가에서 멱을 감았다는 얘기가 부러웠다. 부끄럽거나,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님에도 나는 고향과의 연을 끊어내려 했다.


교코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일로 평생을 고통받고, 도망치며 살아야 했다. 그녀에게 고향은 남을 죽여서라도 벗어나야하는 끔찍한 감옥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증발

프랑스 언론인 '레나 모제'는 <인간증발>이라는 책을 통해 일본의 '증발' 현상을 소개했다. 일본에서는 매년 수 만명의 사람들이 '증발'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일본사회를 하나의 압력밥솥으로 묘사하는데, 약한 불위에 올려진 압력밥솥처럼 지속되는 스트레스를 받던 사람들이 '증발'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족과 사회와의 연결을 끊고 증발 업체(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업체가 있다)를 통해 자급자족 환경에서 살아가거나 서류 없이 일 할 수 있는 곳으로 숨어들어간다.


철학자 칼 포퍼는 저서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를 통해 시행착오와 합리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책의 내용과는 조금 동떨어져있지만 책의 제목이 삶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 같는 생각이 든다. 원하는 것을 위해 움직이다보면 언제나 새로운  문제를 맞닥뜨리고, 안정적인 삶이 이어진다 싶으면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튀어나온다. 교코는 몸에 낙인이 찍힌 것처럼 시스템에 의해 체계적으로 추방당한다. 진창에 빠져버린 것 처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갖고 아둥바둥해보지만 평범한 삶을 살아보려는 시도는 매번 좌절되고 만다.


시스템

사람들이 증발을 선택하는 이유는 뭘까? 일본인들의 증발을 사무라이 정신(e.g. 할복)에 기반한다는 사회학자들의 주장도 있지만, 역사책을 펼치지 않고 설명해본다면 불완전한 사회안전망에 답이 있다. 구멍난 사회안전망으로 인해 노출된 개인을 사회의 기생충, 게으름뱅이로 낙인찍어 버린다면, 막다른 길에 다다른 사람은 시스템의 도움을 요청하기 보다는 담을 넘어 사라지기를 선택하는 것 아닐까.


평범하게 살기

어디선가 읽기를, 자신이 특별하지 않음을 인정해가는게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 어른이 되기엔 아직은 시간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린시절 그렸던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이루는게 얼마나 힘든지는 조금씩 깨닫고 있다. 교코가 그려왔던 평범한 집과 삶의 모습을 교코의 현실을 비교해보니 그녀가 느꼈을 참담함이 조금 더 공감이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열 두 발자국> : 뇌 훈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