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한 길

자유

by 이필립



우리는 흔히 “사람은 함께 사는 사회가 오래 간다”고 말한다. 서로를 배려하고, 이익과 행복을 공유하는 사회가 지속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과연 현재 우리의 사회는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기업의 구조를 살펴보자. 기업은 분명 주인이 있다. 그 주인은 최대 이익을 추구하고, 이익은 주주들에게 귀속된다. 노동자는 이와는 무관하게 월급을 받는다. 운이 좋으면 약간의 인센티브가 추가될 뿐이다. 자본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당연히 기업가 쪽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이다.


단기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빈부 격차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격차를 줄이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국가는 공익보다 자국 이익, 심지어 일부 운영자들의 사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다. 자본의 집중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거대 기업은 대량화와 자동화, 그리고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시장을 장악한다.


우리는 자유 사회를 꿈꾼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 사회란 단순히 방임적 사회가 아니다. 동물 사회조차도 규칙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자유 사회는 기회의 평등이 보장된 사회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일부만 혜택을 누리는 자유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물질적, 육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간 사회다.


그러나 현실은 특정 개인과 계층만을 위한 자본 자유 사회로 흐르고 있다. 자본의 쏠림 현상은 상대적 빈곤을 낳고, 이는 곧 다수의 자유를 박탈한다. 국가는 최소한의 생존권인 의식주에 대한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이러한 기본 권리가 보장되지 않은 채 세금만을 걷고 소비하는 것은 도리어 부정의하다.


이런 주장을 하면 일부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떠올리며 비난한다. 그러나 이들은 누구인가? 바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이다. 이들은 대를 이어 자본의 부를 누리고 있는 자들로, 왕족이나 귀족, 봉건 사회의 연장선상에 있다. 현대 민주사회에서 모두가 평등한 기회를 가진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권력과 미디어를 통해 자유, 평등, 공정, 기회라는 단어를 교묘히 비틀어 자신들의 이익을 선동한다. 다수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상대적 박탈감은 커진다. 우리는 현재 우리의 환경을 냉정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사회는 나와 내 자녀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인가?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라지만,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은 생계를 꾸리기조차 빠듯하다.


주택 가격은 계속 오르고, 결혼은 꿈도 못 꿀 일이 되었다. 미래를 설계할 희망조차 없는 환경에서 많은 젊은이들은 인터넷과 SNS를 통해 자신과 다른 계층의 삶을 목격한다. 단지 부모를 잘 만났다는 이유로 명품을 사고,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극심하다.


부모 세대의 삶을 돌아보면, 그들이 평생 열심히 일했지만 남은 것은 육체적 고통뿐이었다. 현재의 기득권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 통장의 잔고를 고민하고, 매일의 교통비와 데이터 요금을 계산하며 살아가는 서민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GDP 3만 달러를 넘어선 사회라면, 3인 가족의 총 수익이 3만 달러라면 나머지 6만 달러는 어디로 갔는가? 함께 사는 사회라면 3인 가족이 6~7만 달러의 소득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의식주와 여행 같은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야말로 진정한 자유 사회다.


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주의, 수정 자본주의 등 다양한 이념을 논하며 무엇이 옳은지 토론하지만, 서민의 입장에서는 지금보다 나은 환경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깊이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모두가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사회,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비트코인, 블록체인의 이해를 위해 필수 알아야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