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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 없는 블록체인 특구

블록체인

by 이필립


“블록체인 특구”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가 봐도 블록체인 기술을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고 실험하는 공간이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이른바 블록체인 특구라는 곳에서조차 정작 블록체인은 보이지 않는다. 수백억의 예산이 투입되었음에도 가시적인 성과는 거의 전무하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걸까?


특구를 성공시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조건은 ‘전문가’다. 방향성을 설정하고, 기술을 평가하고, 사업의 타당성과 실행력을 검증하려면 반드시 해당 분야를 꿰뚫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전문가 없는 특구는 나침반 없는 항해와 같다. 목적지도 없고, 나아갈 방향도 모르며, 그저 표류할 뿐이다.


블록체인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컴퓨터 과학은 물론이고 수학, 암호학, 경제학, 철학까지 아우르는 복합적인 지식 체계를 요구한다. 한 분야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만으로는 블록체인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국내에서 블록체인 전문가라 불리는 이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특정 분야에 한정된 지식만을 바탕으로 ‘전문가’의 탈을 쓰고 있다. 심지어 채굴, 트랜잭션 구조, 네트워크 합의 같은 기초적인 기술 개념조차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는 마치 주식 전문가가 주식 거래의 기본 개념도 모른 채 방송에 나와 시장을 논하는 것과 같다.


블록체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순히 인터넷이나 책에서 몇 문장 읽는 것으로는 턱도 없다. 수십 시간의 심도 깊은 학습과 경험, 그리고 다양한 분야 간의 융합적 사고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자칭 전문가들은 단편적 지식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마치 진리인 양 퍼뜨리고 있다. 그 결과, 정부와 언론, 학계 모두가 잘못된 인식 위에 정책과 담론을 쌓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과거, 블록체인을 정말 이해한 이들이 모여 정부, 학계, 언론이 함께 참여하는 토론회를 열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왜일까? 정부 자금을 받아 이미 회사 운영을 잘(?)하고 있는 상황에서, 괜히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기존 구도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안전하다.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고스란히 우리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블록체인은 기존 산업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산업은 자금과 인력만 갖추면 상식적인 수준에서도 일정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블록체인은 그렇지 않다. 기존의 상식이나 경험으로는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한 구조를 갖고 있다. 마치 물물교환의 상식으로 모바일 결제를 설명하려는 격이다. 천동설이 통념이던 시대에 지동설을 주장한다고 모두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동설은 과학이고, 천동설은 믿음에 불과했다. 지금의 블록체인 담론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블록체인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최소 10시간 이상의 집중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물론, 그 설명을 하는 사람이 진짜 전문가일 때만 그렇다. 그만큼 복잡하고, 또 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 결정권자나 사업 추진자들은 여전히 블록체인을 얕게 보고, 포장된 말과 그럴싸한 사업계획서만 보고 판단하고 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블록체인 없는 블록체인 특구’다.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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