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기술의 오용인가, 진화인가
암호화폐는 본질적으로 숫자의 조합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암호화폐는 공개키 기반구조(PKI) 위에 구축된, 익명성을 특징으로 하는 디지털 기록이다. 이 구조 안에서 숫자 ‘1’은 그저 계정상 숫자일 뿐, 실제 세계에서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내포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은 이와 다르다. 스테이블코인의 숫자 ‘1’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이는 단순한 디지털 기호를 넘어, 특정 자산과의 1:1 교환 가치를 내포한 ‘의미 있는 숫자’다.
예를 들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에서 ‘1’은 실제 미화 1달러의 가치를 대표한다. 이는 마치 삼성전자 주식 1주가 실제 삼성전자 1주를 의미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도 마찬가지다. 이는 디지털 현금카드와 유사하게, 원화와 1:1로 교환 가능한 전자적 화폐이며, 원화 자체에 대한 신뢰와 예치를 기반으로 성립된다.
경제의 침체와 지역 간 격차가 커지면서 지역화폐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플랫폼 시대, 대형 온라인 기업과 중앙집중적 자본 흐름은 지역 상권을 위축시켰다. 이러한 자본의 집중을 막고, 돈이 지역 내에서 순환되게 함으로써 지역 경제를 살리자는 것이 지역화폐의 출발점이다. 이는 주민들 간의 자율적 합의를 통해 특정 지역 내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는 구조다. 일부 지역에서는 조합을 구성하여 조합원 간 통용되는 공동체 화폐를 운영하기도 한다.
비트코인의 시작도 이와 흡사한 지점에서 출발했다. 중앙 주체 없이, 이용자 간 합의에 의해 작동하는 분산형 시스템. 이는 디지털 기반 지역화폐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이 지역화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건부로 ‘가능하지만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타당하다. 기술적으로 지역 한정 스테이블코인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컨대 특정 지역에서만 사용 가능한 별칭의 코인을 발행한다면, 이는 지역화폐와 기능적으로 유사해질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원화 기반’이라는 점이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전국적으로 동일한 가치와 환금성을 가지기에 지역 내 유통을 강제할 방법이 없다. 이는 특정 백화점 상품권이 실질적으로 전국 어디서나 통용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역성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희석되기 쉽다.
이를 보완하려면 지역 내 사용 제한 기술을 추가로 도입해야 한다. 지역 제한, 가맹점 제약, 기간 제한 등 다양한 제한을 둘 수 있지만, 이는 본래 스테이블코인이 지닌 암호화폐적 속성 즉 자율성과 자유로운 이동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결국 이는 암호화폐 기술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키는 일이다.
본질적으로 지역화폐는 신용카드나 현금카드시스템에서도 충분히 구현 가능한 개념이다.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카드시스템을 구축하면 지역 내에서만 사용되도록 제한하는 것은 과거에도 시행되어 온 방식이다. 그런데 이를 억지로 스테이블코인이라는 고도의 암호기술 위에 구현하려는 시도는, 기술의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오류다.
마치 비행기의 항공역학 기술을 자전거에 억지로 이식하려는 것과 같다. 겉으로 보기에 고급 기술이 사용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성능을 오히려 저하시키며 효율도 떨어진다. 이는 기술의 남용이며, 자원의 낭비다.
지역화폐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와 합의의 문제다. 자율성과 지역성이라는 원칙 위에 탄탄한 사회적 계약이 있어야 지속 가능하다. 기술은 이를 보조할 뿐이지, 본질을 대체할 수 없다. 스테이블코인이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지역화폐의 철학과 기능을 그대로 담아낼 수는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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