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2008년, 비트코인이 세상에 등장했다.
처음엔 누구도 이 작은 디지털 실험이 세계 금융질서에 균열을 낼 수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수많은 암호화폐들이 쏟아졌고, 대부분은 단지 블록체인 위에 존재하는 ‘디지털 숫자’에 불과했다. 실물 경제와의 연결고리는 미약했고, 실사용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그런 가운데 2015년, 암호화폐 역사에 조용한 전환점이 생긴다. 달러와 1:1로 교환 가능한 스테이블코인 USDT가 등장한 것이다. 디지털 자산의 고질적 문제였던 변동성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2018년에는 규제를 고려한 정부 개입형 스테이블코인 USDC가 시장에 진입하며 신뢰성과 투명성 면에서도 진일보했다.
이러한 흐름은 암호화폐 생태계에서 스테이블코인의 필수성을 부각시켰다.
특히 현금 입금이 불가능했던 거래소 환경에서는 USDT가 ‘현금 대용 수단’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암호화폐를 사고파는 매개로서, 그리고 실거래소와 투자시장 사이의 디지털 가교로서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게다가 달러에 고정된 가치는 국제 상거래에 안성맞춤이었다.
변동성은 낮고 신속한 결제가 가능하니, 국경을 초월한 디지털 금융에 어울리는 도구였던 셈이다.
그 결과, 2026년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는 약 30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같은 성장 가능성을 일찍이 감지한 필자는 2016년,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암호화폐 시장에 한국 원화를 심는 작업, 나아가 원화를 디지털 기축통화로 만드는 전략은 단지 기술적 시도가 아니라 국가전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암호화폐는 ‘범죄자나 하는 것’이라는 냉소적 시선에 갇혀 있었다. 필자의 주장 또한 기이한 소리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흐른 지금, 정부는 스테이블코인을 미래 전략 산업으로 주목하고 있다.
늦게나마 관심을 가진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이 적기인가?**라는 질문에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가정 하나를 해보자.
정부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익명 기반으로 발행한다고 하자.
문제는, 그 ‘용처’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현재 국내 거래소는 대부분 현금 입금이 가능하고, 실물 경제에서도 디지털 결제 수단이 과잉이라 할 정도로 발달해 있다.
QR코드, 간편결제, 카드 등 다양한 수단이 실시간으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과연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실질적으로 필요한 곳이 있을까?
디지털 금융 소외계층?
혹은 기명 금융을 꺼리는 일부 사용자?
이렇듯 수요는 협소하고 불명확하다.
또 다른 문제는 범죄 악용 가능성이다.
USDT는 실제로 불법 무기, 마약 거래 등 암시장에서도 사용된 전례가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익명성을 유지한다면 이러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반대로 기명 기반으로 발행하면 어떨까?
현금카드와 유사한 구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기존 결제 시스템과의 차별성이 불투명하다.
대체 어디에서 이 스테이블코인이 사용될 것인가?
그나마 가능한 사용처는 해외 원화 송금 정도다.
하지만 한국 원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유통되지 않으며, 개인의 외환 거래도 엄격히 제한돼 있다.
차익 거래를 통한 수익 구조 또한 실효성이 떨어진다.
시장도 작고, 규제도 강하며, 수요도 없다.
결국 이는 기회를 놓친 전략의 전형이다.
2015~2016년, 암호화폐 시장이 무르익기 전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선제적으로 발행하고, 국제화를 추진했더라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국가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 ‘공공 스테이블코인’이 글로벌 시장에서 독자적 위치를 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들이 시장을 장악했고, USD가 디지털 경제의 기축통화로 자리잡은 상태다.
그런 마당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들고 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이미 파이가 완성된 시장에 계란 하나 더 얹는 것에 불과하다.
필요도 없고, 수요도 없으며, 경쟁력도 떨어진다.
무엇보다도 진짜 안타까운 것은,
스테이블코인을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불과 몇 년 전까지 암호화폐 자체를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이들이라는 점이다.
표면만 보고 기술을 논하며, 기회가 지나간 뒤에서야 뒤늦게 손들고 나서는 모습은
결코 전략적이지도, 책임감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시장 선점은 먼저 움직일 때 가능한 것이고,
기회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 짓는다.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은 새 코인을 찍어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구조 안에서 실질적인 혁신을 도모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