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공공과 기업 현장에는 ‘추첨’이 생각보다 많다. 채용 전형의 무작위 배정, 민원 처리의 순번, 이벤트 당첨, 입찰·배정의 일부 절차까지, 겉으로는 단순한 운(運)의 장치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가 곧 이해관계로 이어지는 순간 추첨은 “공정성에 대한 약속”이 된다. 문제는 그 약속이 종종 ‘설명 가능한 기술’이 아니라 ‘운영자에 대한 신뢰’에 기대어 성립한다는 점이다.
디지털 추첨의 핵심은 시드키(seed key)다. 시드키가 무엇이냐에 따라 난수의 흐름이 결정되고, 결국 당첨 결과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시드키가 인위적으로 생성되거나 발급 과정에 특정 이해관계가 개입될 여지가 있다면, 추첨은 이미 추첨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부정이 없었다”는 주장과 “부정이 불가능했다”는 증명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많은 시스템이 전자서명, 접근통제, 로그 기록을 갖추고 있다 해도, 시드키 생성·발급 단계에서의 불신을 논리적으로 제거하지 못하면 의혹은 구조적으로 남는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신뢰를 설계하는 기술’이다. 운영자 선의에 기대지 않고, 제3자가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개입이 불가능했다”를 보여주는 구조가 필요하다. 내가 제시한 해법은 비트코인의 블록 해시값을 시드키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블록 해시값은 네트워크 합의와 작업증명(Proof-of-Work) 과정을 거쳐 결정되며, 특정 참여자가 원하는 값으로 임의 조작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즉 추첨 결과가 나오기 전, 어떤 운영자도 그 결과를 유리하게 ‘미리 맞추거나’ ‘뒤에서 바꾸는’ 경로가 사라진다. 시드키의 출처가 시스템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공개·검증 가능한 값으로 고정되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기반으로 나는 비트코인 블록 해시를 활용한 추첨 솔루션을 개발했고, 공정성과 투명성을 기술적으로 담보하는 방법으로 NET에 신청해 발표했다. 심사 과정에서 돌아온 질문은 “왜 블록체인을 직접 개발하지 않았느냐”, “비트코인 블록 해시를 쓰는 것이 무슨 대단한 기술이냐” 같은 취지였다. 그러나 공정성의 본질은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심의 여지를 제거하는 것’에 있다. 이미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합의와 검증을 거쳐 생성되는 공개 값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공정성의 앵커(anchor)로 삼는 것이야말로 목적에 정확히 부합하는 공학적 선택이다. 기술은 화려함이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공정성을 다루는 기술은 “누가 믿어달라고 말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와도 검증할 수 있는가”로 평가되어야 한다.
NET 탈락은 결과적으로 한 가지를 더 분명히 보여준다. 추첨 시장에는 여전히 ‘공정성을 증명하는 표준’이 부족하며, 많은 기관이 관행과 신뢰에 기대어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공공의 추첨이 신뢰를 잃는 순간, 비용은 단지 민원 증가로 끝나지 않는다. 조직의 정당성과 사회적 신뢰가 함께 손상된다. 반대로, 비트코인 블록 해시값처럼 조작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공개 값을 활용하면, 추첨은 비로소 ‘절차의 공정성’을 넘어 ‘증명 가능한 공정성’으로 진화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비트코인이 결제 수단을 넘어, 사회 시스템의 신뢰를 보강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숨겨진 기술적 가치다. 탈락은 끝이 아니라, 시장이 아직 이 가치의 언어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는 신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증의 유무가 아니라, 공정성을 요구하는 현장에 “검증 가능한 방식”을 끝까지 제시하고 확산시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