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점을 보지만, 점은 없다
우리는 종종 점을 본다. 미래를 알고 싶어 하고, 운명을 예측하며 삶의 방향을 찾으려 한다. 점쟁이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운세를 묻는 순간, 우리는 이미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작은 점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연 실재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일 뿐인가?
지도 위의 점은 특정한 위치를 가리킨다. 그곳은 목적지이자 방향을 설정하는 기준점이다. 우리는 점을 따라가면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점을 확대하고 또 확대해 보면, 그 점은 더 이상 점이 아니다. 경계가 사라지고, 의미도 흐릿해진다. 마치 점의 예언이 확대될수록 허구로 드러나는 것처럼, 점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본질을 잃는다.
점(dot)과 점(占)은 닮아 있다. 둘 다 방향을 제시하는 듯하지만, 그 자체로는 실체가 없다. 점은 지도에서 그려진 허구의 기호일 뿐이며, 점은 우리의 상상과 기대가 만들어낸 의미의 환영이다. 이들은 모두 현실을 단순화하고 축소시킨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도 속의 점은 길을 나타내지만, 실제로 그곳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기대했던 풍경이 펼쳐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마찬가지로 점은 미래를 암시하지만, 그 예측이 현실과 일치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점은 상징일 뿐이다. 그 상징을 믿고 행동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지만, 동시에 그 자유를 제한하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점의 가장 큰 폐해는 인간의 자유와 가능성을 제한한다는 데 있다. 점괘는 미래를 하나의 고정된 결과로 단순화한다. 인간은 무수한 가능성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점괘는 그 가능성을 하나의 좁은 길로 축소시킨다. 점에 의존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선택과 책임을 포기하고, 허구의 점에 운명을 맡긴다.
점에 대한 의존은 인간의 불안에서 비롯된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우리는 확신을 원하고, 보이지 않는 길 대신 눈에 보이는 지표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선택과 행동을 통해 만들어가는 존재다. 삶의 의미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점(占)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자유를 기꺼이 포기한다. 점괘가 가리키는 방향을 운명이라 여기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만약 점괘가 맞으면 운명을 예언한 신비로 받아들이고, 틀리면 자신의 해석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고 자책한다. 이런 태도는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게 만들고, 자유를 제한하며, 삶을 허구에 가두어버린다.
점(dot)은 지도의 일부이며, 점(占)은 운명의 일부다. 그러나 지도는 현실의 축소판일 뿐이며, 점괘는 복잡한 인생의 일부만을 단순화한 상징에 불과하다. 점(dot)이 가리키는 위치는 현실과 다를 수 있고, 점이 예측하는 미래는 수많은 변수 속에서 달라질 수 있다. 점을 믿는 행위는 삶을 축소시키고, 현실을 단순화하며, 선택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점(dot)은 출발점일 수 있지만, 결코 도착지가 아니다. 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하나의 해석일 뿐이며, 고정된 운명이 아니다. 점을 확대할수록 그 본질이 사라지듯, 점괘를 파고들수록 미래는 더욱 불확실해진다.
인생은 점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점을 찍고 그 사이를 연결해 나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점을 바라보는 대신, 직접 선을 그어가며 길을 만들어야 한다. 점에 의지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야 할 길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점을 뛰어넘어 스스로 길을 그리면, 인생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확장된다.
결국, 점은 허구의 시작이자 의미의 창조다. 점 또한 마찬가지다. 점은 없다. 다만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새로운 점을 만들어갈 뿐이다. 우리는 점을 따라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점을 만들어가는 존재다.
점을 보지만, 점은 없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점이 아니라, 그 점을 연결할 수 있는 무수한 길이다. 삶의 방향은 허구의 점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길 위에서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