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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글사랑 Dec 15. 2023

나 사용설명서

내가 나를 사용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나 사용설명서를 쓴다

내가 나를 사용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나 사용설명서를 쓴다. 특별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않기에 자유롭지만 경우의 수가 많아 혼란스럽다. 매일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충분한 소화력이 얼마인지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하루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가고 있다.


사용하기 전 조심해야 할 점은 매월 25일은 피해라. 주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은 예민해져 괜히 시비를 건다. 잘못 걸리면 큰일 난다. 열이 나는 경우는 우선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인다. 열은 왜 나는 것일까. 기대치가 높고 상대의 말보다 내 말을 강요하고 싶은 욕망이 크기 때문이다. 분위기에 약하다. 가을을 타고, 날씨를 타고, 낯을 탄다. 여기서 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감수성이 예민해서 주변 분위기에 따라 흔들림이 크다. 좋아하는 대상에 몰입도가 높지만 금세 식는 단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 내부 심리 정보 및 정신 분실 시 피해 방지 설정이다. 그러기 위해 나의 기능을 면밀히 점검해야 한다. 내 안에 어떤 기능이 잠재되어 있는지 반드시 경험해 보길 바란다. 10년, 20년 후 좋아하는 스타일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면 장수할 가능성이 높다.


추가로 자세한 설명이 듣고 싶다면 미리 전화 예약을 하면 된다. 나 사용설명서는 개별 맞춤형이기에 개별 상담으로 진행된다. 소요시간은 최소 30일에서 100일을 예상한다.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부작용은 모든 게 순탄하게 진행된 거 같지만 한 번씩 오작동으로 수명을 다하기도 한다.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반드시 전문의의 도움을 권한다.


이처럼 나에 대한 사용설명서를 세밀하게 써보고 싶다. 분위기에 약한 단점은 장점이 되기도 한다. 나를 뒤흔드는 건 마음이기에 분위기를 잘 이용하면 금세 평온해진다.


퇴근길 바지 단이 짧아서 춥다는 남편 말에 바지를 사러 갔다. 통이 넓은 와이드 스타일 옷이 대부분이었다. 운동화에 어울리는 바지를 원해 스판기 있는 어두운 면바지를 샀다. 비가 오고 저녁 식사시간이 늦어 집에 가자마자 만들 낙곱새전골 밀키트를 샀다. 먼저 퇴근한 남편은 조금 상기된 표정이었다. 배가 고프면 민감한 나이기에 눈치를 보며 사온 바지를 입어보라고 했는데 바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비 오는데 일부러 가서 사 온 건데 굳이 그렇게 인상을 써야 하냐고 말했다.


어색한 분위기보다 배가 고팠다. 우선 급하게 낙곱새전골을 사용설명서에 맞혀 10분 안에 끓여서 저녁을 차렸다.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 맛에 남편의 얼굴이 밝아졌다. 매콤해서 나의 선택에 만족하며 남편에게 어떠냐고 물으니 맛있다며 다음에 또 사 오라고 했다. 아까의 어색한 분위기는 잊고 우리는 국물 맛에 푹 빠졌다. 분위기가 좋아지니 남편은 나의 노고를 안다는 듯 자신이 기분 상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다 듣고 나니 나의 성급했던 부분에 대해 사과를 했다. 어느새 우리는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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