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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 돈 없는 래퍼들은 돈 얘기만 할까?

연세대 경영혁신학회 28기 여석원


‘요즘 래퍼들은 돈 얘기만 한다’


난 돈을 세 하루 종일 세 밤을 새

나는 친구들과 우주로 여행
나는 노느라고 정신없어 전화 그만해
나는 돈 버느라 정신없어 전화 그만해
하루 24시간도 부족해
왜냐하면 나는 놀러 가야 돼
하루 24시간도 부족해
왜냐하면 나는 돈을 세야 돼

UNEDUCATED KID의 ‘24hrs’ 中


    위의 가사는 2018년 발매된 래퍼 UNEDUCATED KID의 노래인 ‘24hrs’의 가사 중 일부분이다. 그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위 가사를 보게 된다면, 그가 돈을 세는데 밤을 샐 정도로 돈을 잘 번다고 생각할 수도 것이다. 하지만 재미 있는 사실은 저 가사를 쓸 당시에 그는 돈을 잘 버는 가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완전한 무명에서 시작해 이제 막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신인 가수였다. 비단 UNEDUCATED KID뿐만이 아니라 한국 힙합씬에서 최근 몇년간 소위 '돈자랑' 가사를 쓰는 가수들이 부쩍 늘고 있다. 도끼나 더콰이엇 같이 실제로 돈이 많은 래퍼들이 성공을 자랑하는 것에서부터, 2018년의 UNEDUCATED KID와 같이 무명인 래퍼들까지도 너나 할 것 없이 가사에서 돈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미 성공한 래퍼들이 자신의 넘치는 돈을 자랑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지만, 도대체 돈 없는 래퍼들은 왜 가사에서 돈자랑을 하는 것일까?



클리쉐의 탄생

[ 힙합은 뉴욕 브롱크스의 작은 클럽들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출처: Dubspot ]

    힙합은 1970년대 뉴욕 브롱크스의 빈민가에서 태동하였다. 당시 뉴욕에서는 디스코 음악이 인기였기 때문에 많은 DJ들이 파티나 클럽에서 디스코 음악을 자주 틀었다. 그들은 때때로 이 음악들의 간주 부분을 계속 반복하여 틀어주곤 하였다. 가사가 없는 비트만을 계속해서 틀어준 것인데,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이런 비트 위에 빠르게 말을 뱉는 것이 랩의 시초가 되었다. 브롱크스의 허름한 빈민가에서 시작된 이 문화는 빠르게 퍼져나갔고 점점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다. 힙합이 음악 시장의 메인스트림에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빈민가 출신이지만 힙합 음악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성공 이후 자신의 가사를 통해 '길거리에서 총질을 하고 마약을 팔았던 내가 이제는 랩을 통해 이렇게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탄다. 너희도 나처럼 열심히 산다면 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던지기 시작하였다. 음악을 통해 큰 부를 축적한 래퍼의 수가 점차 많아지면서 성공한 래퍼의 돈자랑은 힙합의 장르적 문법이 되었다. 



Fake it till you make it!

[ Lil Wayne은 성공 이전에도 돈자랑을 하는 가사를 썼다. 출처: Billboard ]

    한동안 가사에서 돈 자랑을 하는 것은 성공한 래퍼들만의 특권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가난하고 아직 성공하지 못한 미국 빈민가의 래퍼들도 마치 자신이 성공한 것처럼 가사에서 돈자랑을 하기 시작한다. 이런 다소 이해가 안 가는  현상의 이면에서는 'Fake it till you make it'의 자기 암시가 담겨있다. 말그대로 진짜 성공한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자기 암시를 통해 실제로 성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인데, 신기하게도 이런 가사를 쓴 래퍼들 중에서 실제로 성공한 사례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인간의 육체는 정신이 지배하기에, 암시를 통해서 인간의 정신을 속여 어떤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식의 말들은 그동안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배척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암시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실제로 성과를 내고 있다. 2014년 뇌 과학자이면서 정신과 전문의인 헨릭 윌터 교수는 기능성 자기 공명 영상 촬영을 통해 '자기암시'가 건강에 해로운 음식에 끌리지 않도록 하는데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출판하였다. 또,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의 로디 바우마이스터 교수는 자기 암시를 통해 뇌의 학습 탄력성을 의미하는 '가소성'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즉, 'Fake till you make it'이라는 믿음 아래에 거짓으로 가득한 가사를 썼던 미국 빈민가의 래퍼들은 의도를 했건 하지 않았건 꽤나 과학적이면서 효과적인 방법을 통해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뻔한 돈 얘기가 어때서


    미국에 비해 사회 분위기가 다소 보수적인 한국의 특성상, 돈자랑을 하는 랩은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힙합이 한국에 보급되었음에도 한동안 듣기 힘들었다. 가리온과 소울 컴퍼니로 대표되었던 2000년대의 한국 힙합 언더씬의 분위기에서 많은 래퍼들은 자신의 삶을 담은 진솔한 가사에 치중해서 음악을 만들었다. 하지만 2011년 설립된 일리네어 레코즈의 멤버들인 도끼와 더콰이엇 등을 필두로 가사에서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는 래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특히 일리네어 레코즈의 컴필레이션 앨범인 '11:11'이 장르 팬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고, 도끼와 더콰이엇이 프로듀서로 참가한 쇼미더머니 3가 상업적으로 흥행에 성공하면서 이런 메시지는 더욱 빠르게 퍼져나간다. 이후 시간이 흘러 힙합의 본고장인 미국에서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무명이지만 가사에 돈자랑을 담은 래퍼들이 나타나게 된다

[ 가난했던 UNEDUCATED KID는 결국 성공했다. 출처: UNEDUCATED KID 인스타그램 ]

    이런 트렌드에 대해 힙합의 '본질'이 퇴색되었다며 아쉬워하는 장르 팬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흐름이 지극히도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돈 얘기를 하는 래퍼가 늘어난다고 해서 진솔한 가사를 쓰는 래퍼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씬 내에서 더 다양한 주제로 노래하는 가수들이 생김으로써, 리스너들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이에 더해 필자는 힙합의 '본질'이 진실된 가사를 뱉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본질'을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힙합은 클럽에서 처음 탄생했다. 힙합은 클럽에 온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생겨났다. 따라서 '본질'의 측면에서 논하여도, (실제로는 가난하지만) 넘치는 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한국 음악 시장에서 힙합이 과도기를 넘어 성숙기로 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더욱 열린 자세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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