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 120회(2008년 9월 6일 방영)
2008 베이징 올림픽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이용대, 이효정 선수를 초대해 멤버들과 배드민턴 시합을 펼쳤던 특집. 어떤 물건이나 손가락만으로도 상대방의 셔틀콕을 받아치는 박명수의 진기명기가 돋보였다. (출처 : 나무위키 ‘무한도전 레전드’)
무한도전 에피소드 중 레전드로 불리는 것들이 있다. 앞에 소개한 120회는 나무위키 기준 레전드 8위에 랭크된 방송인데 여전히 짤로 돌아다니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배드민턴 경기 중 박명수가 던진 셔틀콕이 상대 코트에서 땀을 닦고 있던 전진의 손에 날아와 살포시 손가락 사이에 낀 장면이다. 출연자들도 예능신이 강림했다며 신기해했고, 덕분에 이 장면은 긴 생명력을 갖게 됐고, 며칠 전 인스타그램 무한도전 팬페이지에서 다시 한번 보게 됐다.
우리나라 예능 프로그램의 역사를 정리한다면 무한도전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만약 지난주 봤던 예능이 오늘 재방송을 한다면 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으니 재미가 없으니까. 그런데 10년이 지난 무한도전 에피소드가 재방송으로 나오고 있으면 채널을 돌리다 말고 보게 된다. 아직도 TV에서는 무한도전 재방송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고, 인스타그램에는 유저들이 요청하는 무한도전 클립을 만들어주는 팬페이지가 여럿 있다. ‘놀면 뭐하니’에 박명수와 정준하가 함께 출연이라도 하면 ‘무한도전’을 키워드로 기사가 쏟아진다. 그만큼 관심이 꾸준하다.
왜 사람들은 무한도전을 좋아하고 그리워할까. 나도 무한도전과 함께 20대를 보낸 시청자 중 한 명으로서 여전히 종영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그리움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멤버들에 대한 아쉬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멤버 개인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멤버들이 모여 만드는 화음,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케미’에 대한 향수 일지 모르겠다. 서로를 오래 지켜보고 상대의 습관을 잘 알고,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반응하겠구나 예측도 하고 그에 따라 ‘티키타카’를 주고받는 멤버들의 모습 말이다.
그리고 그 향수는 무한도전에 느끼는 것을 넘어 우리가 지나 보낸 시간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중학교 3학년, 우리도 여느 남자아이들처럼 몰려다녔다. 3학년 6반 복도 쪽 분단에 앞뒤 두 자리씩 앉은 4명을 중심으로 쉬는 시간, 점심시간이면 다른 반에 있던 친구들까지 총 8명이 모였다. 농구를 했고, 축구를 했고, 볼링을 치고, 오락실과 피씨방을 다녔고, 무한리필 고깃집에서 이제 그만 나가라고 타박을 받을 때까지 불판에 고기를 얹고, 여기저기 동네를 쏘다녔다. 어쩌다 보니 8명은 학교가 끝나고 보습학원까지 같이 다니고 있었다. 티키타카라는 말도 없던 때였는데 지금 떠올리면 티키타카가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은 우리가 노는 시간에 찾아오면 됐을 것 같다.
오락실에서 ‘Pump it up’ 연습을 마치고 누군가의 집으로 라면을 먹으러 가던 날이었다. 그 날은 아마 멤버가 6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여름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굴다리를 지나 철길 옆 주택가 골목을 지나고 있었다. 옆으로 배달 오토바이가 한 대 지나쳐갔다.
“저기에서 천 원짜리 안 떨어지나...”
혼잣말인지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소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누군가 했다. 오락실에서 펌프를 한참 뛰고 더운 상태였으니 속마음이 삐져나온 것 같았다. 다른 5명도 같은 마음이었겠지.
그 순간 명장면이 탄생했다. 우리를 지나치던 배달원의 오른쪽 점퍼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이 펄럭이며 떨어졌다. 지폐 두 장이 각기 다른 궤적으로 팔랑이며 골목에 떨어지는 장면이 느린 속도로 이어졌다. 예능신이 강림한다는 표현은 이때 쓰는 것이다. 그 혼잣말이 주문이 됐던 것일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합의도 없었는데 순간 한마음으로 모두 조용히 있었다. 몸으로 설레발을 치는 사람도 없었다. 사냥을 앞둔 고양이처럼 눈을 똑바로 뜨고 몸은 움츠리고 오토바이가 이 상황을 모르고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오토바이는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우리 중 가장 앞서 있던 친구가 ‘기적’을 주워 올렸다. 환호했다. 6명이 동시에 환호했다. 저마다의 소감을 쏟아냈다. 현실이 맞는지 궁금해하는 이도 있었다. 목적지로 향하던 우리는 경유지가 생겼다. 바로 근처에 농협이 있었고 지하에는 하나로마트가 있었다. 사람은 6명, 돈은 이천 원. 3백 원짜리 아이스크림 6개를 샀고, 2백 원이 남았다. 2백 원을 쓸 방법을 찾았지만 껌도 살 수 없어 포기했다. 각자 아이스크림을 깨물며 하나로마트 계단을 올라왔다. 다시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타박을 했다. 그리고 함께 웃었다.
“오천 원짜리를 떨어뜨리라고 했어야지 새꺄”
무한도전은 끝났지만 유재석은 여전히 최고의 예능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박명수, 정준하, 정형돈, 하하, 노홍철, 전진, 길, 양세형, 광희, 조세호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변함없이 일하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시즌2를 기대하고 있다. ‘놀면 뭐하니’에 옛 무한도전 멤버들이 등장하거나 ‘런닝맨’에서 하하가 무한도전을 언급하거나 또는 어느 다른 프로그램에서 무한도전 멤버 중 2~3명이 출연할 때면 무한도전 생각이 모락모락 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며 기대감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잊을만하면 ‘무한도전 시즌2’에 대한 추측기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나도 시즌2를 한때는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즌2는 현실이 되지 않을 것이다. 10년 전 멤버가 모인다 하더라도 그 시절 케미가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케미는 멤버로만 이뤄지지 않으니까. 시간도 함께 필요한 일이니까.
16살, 폭발하는 케미를 자랑하던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이천 원의 기적을 목격한 6명을 포함한 8명의 멤버들도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을 거치며 여기저기 흩어졌다. 필연이었다. 어떤 이는 서울로, 어떤 친구는 호주로, 어떤 친구는 대전으로 거처를 옮겼고, 회사원, 선생님, 차량 정비사, 미용사 등 직업도 제각각이 됐다. 그렇게 20년이 지나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도 생기고, 연락처도 모르게 된 사람도 있고, 친구를 건너 소식만 알게 된 사람도 생겼다. (재작년, 초등학교 동창들과 회갑 기념으로 중국 여행을 다녀와 책상 위에 기념사진 액자를 크게 올려놓은 아버지가 갑자기 조금 부럽다.) 여전히 몇몇 친구들은 명절마다 고향에 모여 16살 그 시절처럼 낄낄거리고 서로 욕하고 지난 이야기를 끄집어내 놀기도 하지만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지난달 구정 연휴에는 모이지 못했다. 작년 추석에도 모이지 않았다. 이렇게 시즌2는 커녕 재방송조차 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는 것일까. 그날 그 이천 원 이야기를 다시 꺼내볼 날이 언제 올지 모른 채 성큼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