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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촌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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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Mar 20. 2021

크리넥스

전에 살던 집은 홈플러스가 5분 거리였다. 심지어 퇴근길 동선 위에 있어서 이틀 동안 세 번 가는 날도 있을 만큼 자주 다녔다. 작년에 이사를 왔더니 이번에는 이마트가 가까워졌다. 전국 이마트 지점 중 매출 1, 2위를 다투는 점포였다. 심지어 이 마트도 퇴근길 동선 위에 있었다. 아이가 둘이 되고, 코로나로 애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장 봐야 할 것들도 덩달아 많아졌다. 그래서 포인트라도 조금 더 쌓아볼 요량으로 이마트 제휴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새로 만든 신용카드는 이마트에서 사용한 지출의 2%가 포인트로 쌓인다. 그리고 1회 지출이 10만 원을 초과하면 6천 원이 청구 할인된다.(월 1회, 전월 실적 충족 시) 한 달에 한 번, 10만 원 이상 장을 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돈이 없는 것이 문제일 뿐 카트에 10만 원을 담는 일은 고민하지 않아도 발생하는 일이었다.     


코로나 심화로 수도권 대형마트 영업시간이 오후 9시로 짧아졌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들과 마트에 가기 어려워 주로 퇴근길에 혼자 장을 봤다. 그날도 퇴근길 전철에서 와이프와의 카톡으로 접수한 장바구니 목록을 살펴봤다. 파프리카, 애호박, 브로콜리, 바나나우유, 불고깃감 한 근, 우유, 시크릿쥬쥬 바스볼... 마트에 도착해 카트로 돌며 차근차근 주문 상품을 담았다. 필요한 것들을 담고 눈대중으로 계산해 보니 7만 원 남짓 되는 것 같다. 6만 원 정도면 그냥 계산하고 갈 텐데 7만 원이라 갈등이 생긴다. 3만 원 정도 사놓을 물건이 있으면 6천 원이 할인되는데. 아내에게 전화해 추가 접수를 받았다. 롤휴지, 각티슈의 재고가 많지 않다고 한다.    

  

한쪽 구석에 큰 부피로 쌓여있는 휴지들도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2겹과 3겹(최근에는 4겹도 나온다), 펄프의 종류, 브랜드, 부드러움이나 엠보싱이나 친환경성 같은 제품의 특징까지 반영된다. 각티슈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쪽 시장에서는 당연히 크리넥스가 가장 비싼 편이다. 깨끗한나라, 모나리자, 코디와 같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브랜드들이 경쟁하고 있지만 메인 매대는 크리넥스의 차지다. 고민하지 않고 전시상품 중 가장 비싼 ‘크리넥스 3겹 데코&소프트 화장지(30롤)’을 카트에 올렸다. 각티슈도 ‘크리넥스 보습에센스 로션 천연펄프 미용티슈 3겹’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의 티슈를 카트에 담았다. 카트는 이제 넉넉하게 10만 원을 넘겼다.      


어린 시절, 또래에 비해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컸다. 나이가 적을 땐 잘 몰랐지만 중학교 신발장에서, 고등학교 친구들의 후드티에서 나는 브랜드가 조금 다른 것을 느꼈다. 나와 120km 떨어진 곳에서 자라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형제가 많았던 아내는 ‘아이스크림이 남았다. 과자가 남았다. 과일이 남았다.’는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집에서 자랐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비싼 휴지를 좋아한다. 나는 두툼하고 부드럽고 향기까지 나는 롤휴지를 사용할 때 절대적인 가난에서 벗어났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낀다. 아내는 코를 여러 번 풀어도 코밑이 까지지 않는 미용티슈가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실제 나도 감기에 한 번 걸리면 하루에 각티슈를 한 통씩 쓰는데 비싼 휴지는 코가 헐지 않는다.  

    

소름 끼치게 싫어하는 ‘가난의 표식’이 몇 개 있다. 전부 생각나지는 않지만 따뜻한 물을 큰 다라통에 받아서 쓰는 일, 방문이 벽까지 활짝 열리지 않는 일(방이 좁거나 짐이 많아서 문 뒤편까지 무엇인가 놓인 상황), 서랍이 깔끔하게 닫히지 않는 것(마찬가지로 정돈이 되지 않고 짐이 많아 서랍이 툭툭 튀어나오는 일) 등이다. 스탠드 불빛도 요즘은 인테리어 효과를 위해 주백색(백열등색) 전구를 사용한다 하지만 내게는 마루 기둥과 화장실에 켜있던 ‘가난한 색’으로 보일 뿐이다.     


아버지도 정년까지 일하는 직장에 다니고, 나도 직장생활을 10년 하면서 이제는 그런 가난은 겪지 않는다. 유복한 것은 아닐지라도 중국집 가서 탕수육도 쉽게 시키고, 모임에서도 기분 좋게 내가 계산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마음도 편해졌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하지 않던가. 앞으로 오랫동안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 모습으로 지내고 싶다. 당연히 휴지도 크리넥스를 계속 쓸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언젠가 엄마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소박한 꿈을 전했다.

     

“엄마, 나는 돈 벌면 집에서 여름에는 잠바 입고 겨울에는 빤쓰만 입고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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