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만큼이나 첫 야구 직관(직접 관람)의 기억도 뜨겁다. 13살 정도 됐을까, 집 근처 청주야구장에 첫 직관을 갔다. 청주구장은 대전을 연고지로 하는 한화이글스의 제2의 홈구장이다. 그렇다. 집안 대대로 한화이글스의 팬이다. 참고로 대전과 청주, 인근 소도시를 포함하는 지역의 야구팬은 대부분 한화이글스 팬이며 그들의 팬심은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모태신앙처럼 갖고 태어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아빠 손에 이끌려 갔던 첫 직관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TV에서만 보던 경기장, 스탠드, 선수, 관중이 눈앞에 있었다. 우리는 경기 시작 시간보다 늦게 도착해 외야에 자리를 잡았다. 전광판 바로 옆자리였다. 벌써 취해서 소리를 치는 사람도 있었고 술에 취하지 않은 사람들도 대부분 흥분 상태로 경기 내내 열띤 응원을 했다. 앉아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외야에서는 선수들이 잘 안 보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가까이 보였다. ‘신남연’이라는 한국명으로 사랑을 받았던 제이 데이비스 선수가 중견수로 출전했다. 매 이닝 수비마다 우리 앞으로 나와 있었다. 손을 내밀면 하이파이브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 만큼 가깝게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외치면 슬쩍 우리 쪽으로 돌아봐주는 소소한 팬서비스도 했다.
첫 직관 경기는 팬들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갔다. 리드를 잡지 못한 것이다. 한화는 시종일관 질질 끌려가며 9회 말 한화의 공격 차례를 맞았다. 점수는 4:7.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미리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사람이 생겼다. 그 와중에 한화의 주자가 하나둘 쌓이더니 2사 만루가 됐다. 관중석에 남은 사람들만으로도 갑자기 경기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한 방이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그리고 마지막 타자로 임수민 선수가 타석에 등장했다. 특별히 타격이 좋은 선수는 아니었지만 뜬금없이 날려주는 장타가 있는 선수였다. 이때는 임수민 선수는 이승엽이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관중이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임수민 선수가 그날 경기의 마지막 타자가 되지 않기를 모두 바랐다. 영웅이 되어야 했다. 나도 생전 처음으로 ‘임수민’ 세 글자를 있는 힘껏 외쳤다.
우리의 바람과 달리 그는 경기의 마지막 타자가 됐다. 내야 땅볼로 경기가 끝났다. 한화는 경기에서 졌다. 우리도 다른 관중들과 섞여 주차장으로 빠져나왔다. 이상하게 진 기분이 아니었다. ‘졌잘싸’가 이런 것일까. 졌어도 기분은 짜릿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관중 무리도 다들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2006년과 2007년, 객지에서의 대학생활을 잠시 접고 고향에서 공익근무를 하며 청주에서 열리는 한화이글스 경기를 자주 찾았다. 당시 한화는 홈경기 63게임 중 청주구장에 매년 9경기 정도를 배정했다. 3연전 기준으로 3번 정도 찾아오는데 나도 덕분에 일 년에 서너 번 야구를 직관할 수 있었다. 관람 준비는 이랬다. 내가 티켓 3장을 예매하고 퇴근시간에 맞춰 치킨과 김밥 같은 저녁거리를 준비한다. 6시에 칼퇴를 하고 퇴근하자마자 아버지와 동생, 즉 집안의 남자들만 곧바로 청주구장으로 차를 달린다. 티켓부스에서 예매한 표를 찾고 입장하면 막 2회를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느긋이 포수 뒤편의 로얄석에 앉아 포장해온 저녁식사를 무릎 위에 차린다.
당시 한화이글스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강팀’이었다. 2006년에는 준우승, 2007년에는 3위로 시즌을 마감할 정도로 잘 나가는 팀이었다. 여기에 청주에서 하는 경기는 다른 때보다 승률도 훨씬 높았다. 9경기 중 7경기는 이기던 시절이었다. 청주에서의 높은 승률은 매치업의 영향도 있었는데 당시 주로 LG트윈스가 매치업 상대로 초청됐다. LG그룹 주요 계열사의 공장들이 청주에 모여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LG트윈스는 DTD를 매년 실천하는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청주 경기는 열리기만 하면 거의 이겼고 티켓은 매번 매진됐으며, 3연전 기간 동안 경기장 주변은 그야말로 지역축제의 현장이었다. 우리도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김밥을 먹으며 현장의 분위기를 흠뻑 느꼈다. (이제와 돌아보니) 그때 2년이 야구팬으로서의 인생 중 가장 뿌듯하고 즐거운 시기였다.
대학에 복학하고 나서도 종종 야구장을 찾았다. 2호선을 반 바퀴 돌면 잠실구장에 갈 수 있었고, 목동구장도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 찾아가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복학한 2008년부터 한화는 전혀 다른 팀이 됐다. 순위는 바닥에서 찾는 게 훨씬 빨랐고 실책, 실점, 피안타율 같은 나쁜 지표는 1, 2등을 다퉜다. 잠실을 찾아도 패배, 목동을 찾아도 패배였다. 심지어 류현진이 선발로 등판하는 날에 맞춰서 가도 패배했다. 이번에는 다르겠지, 이번에는 좋아지겠지 주문을 외우며 경기장을 찾았지만 청주에서 느꼈던 희열은 더 이상 얻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목동 경기에서 신경현 포수의 도루 저지 송구가 2루수 머리 위를 한참 지나 저 멀리 중견수에게 까마득히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한화이글스의 순위에 대한 기대는 접어버렸는지도 모른다.)
2020년, 한화는 다시 한번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를 새로 썼다. 18연패. 발음조차 조심해야 하는 이 소중한 기록 앞에서 나는 주변에도 그리고 속으로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연패가 이어지는 동안 ‘오늘은 이기겠지’하는 기대도 하지 못했다. 저 실력으로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야구가 내 인생에 도움이 된 것도 아니고, 내가 한화 구단에 투자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한 명의 팬일 뿐인데 왜 이런 좌절과 실망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두산 팬인 친구는 해마다 한국시리즈까지 야구를 보는데... 그렇다고 어느 순간 응원하는 팀을 바꾸는 것도 야구팬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5-8-8-6-8-9-9-6-7-8-3-9-10
13번의 시즌 중 6번의 최하위
2008년 복학 이후 한화이글스의 성적이다. 그 기간 동안 별별 시도를 다 했다. 역대 감독 다승 1, 2위인 김응룡, 김성근 감독을 모셔보기도 하고, 큰돈을 쓰며 국가대표 테이블세터를 영입하기도 했다. 팬들은 오버페이라고 했지만 FA로 투수도 여러 명 데려왔다. 모든 시도가 헛수고였다. 그리고 2021년은 첫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며 대대적인 새로운 시도를 펼친다고 한다. 사전조사에서도 올 시즌 최하위 후보로 압도적 득표를 했는데 반전이 있을까.
시범경기가 시작되자 정규시즌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3연승'을 했다. 벌써부터 희망의 모습(또는 설레발)을 얘기하는 기사도 보인다. 한화이글스의 선수와 코치가 ‘칰무원*’이라고 불리는 온정주의가 과연 종말을 맞게 될지 궁금하다. 시범경기의 패기가 '봄데*'와 함께 사그라드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팬으로서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승률 4할 8푼. 5할을 넘는 상위권 팀은 바라지도 않는다. 언감생심이다. 나도 양심은 있다. 그저 다른 팀들과 대등한 경기를 할 수만 있으면 바랄 게 없다. 한화이글스에 관해서라면 더 많은 이야기, 더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여기까지만 하기로 한다. 나도 회사에서 열심히 할 테니 한화도 야구 열심히 해줬으면 좋겠다. 연말에는 나도 좋은 평가를 받고, 한화도 웃으며 시즌을 마무리하기를 바란다. 간절하게.
* 치킨+공무원의 합성어. 치킨은 한화이글스를 얕잡아 부르는 말로 ‘칰무원’은 공무원처럼 오랜 기간 선수와 코치로 일하는 한화이글스 구성원을 뜻한다
* 매년 시범경기 기간에만 반짝 경기력을 발휘하는 롯데자이언츠를 일컫는 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