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하던 일을 마치고 다음 일을 해야 하는데 두 시간만 있으면 퇴근이라는 생각에 귀찮음만 가득해졌다. 이래저래 일하기 애매한 시간에 칼퇴를 기다리며 커피를 한 잔 뽑아 자리로 돌아왔다. 카톡. 학교 후배다.
“형, 회사가 여의도라고 하셨죠? 저 오늘 여의도에서 면접 하나 보고 이제 가려고요. 고생하세요”
후배가 지하철을 타기 전에 부랴부랴 키보드로 카톡을 날린다. 여기까지 왔는데 저녁 먹고 가라. 두 시간만 기다려라. IFC 구경하다 6시에 이쪽으로 와라. 후배는 어쩔지 잠시 고민을 하다 두 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스물일곱에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도 취직이 빠른 편이었는데 후배는 그보다 빨리 스물여섯에 취업에 성공했다. 후배는 모 은행에 취직했는데 집 근처 지점에 발령받아 ‘셔터맨’을 전담하게 됐다. 여느 회사가 그렇듯 사소하지만 반복되는, 몸으로 때워야 하고 귀찮은 일은 젊은 남자 직원들이 하게 되는데 나도 그렇고 후배도 그렇고 그런 일을 맡아하던 시기였다. 후배는 아침에 지점에 가장 먼저 나가서 문을 열고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까지 매장을 정리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1년 정도 다녔을까, 후배는 빵빵한 연봉의 첫 회사(나와 초임이 무려 2천만 원 가까이 차이가 났다)를 때려쳤다. 차라리 신용카드를 팔아오라는 지시는 따르겠는데 셔터맨을 비롯한 ‘막내 남자 사원의 일’이 버겁다고 했다.(비단 그것이 퇴사의 핵심 사유는 아니겠지만) 다시 두렵고 황량한 취업시장으로 나간 후배는 스터디를 다니며 재취업을 준비했고 내가 다니는 회사 근처에 면접이 생겨 다녀가는 길에 내게 연락을 했다.
나도 겨우 2년 차 시즌을 간신히 보내는 중이었다. 새로 발령받은 팀은 팀장이 전년도에 팀원 4명 중 3명이 퇴사시킨(그중 두 명이 입사동기, 다른 한 명은 촉망받는 에이스급 선배였다) 곳이었다. 명불허전이었다. 팀장이 만드는 불편한 근무환경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사실 이미 몇 달 전 '팀장님, 저 회사 그만두겠습니다'라는 대사를 나도 질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나보다 하루 전에 같은 팀 선배가 '퇴사하겠습니다'를 외치는 바람에 나의 '퇴사하겠습니다'는 무시됐다. 그렇게 유야무야 지내던 중에 회사 근처에 온 후배가 무척 반가웠다. 후배를 핑계로 칼퇴도 하고, 만난 김에 이직 희망자로서 취업 분위기는 어떤지 시장 동향도 살피고, 또 현직자로서 주제넘은 위로와 조언도 건네고 싶었다.
후배와 만나 장소를 잠시 고민하다 여의도백화점 2층에 있는 창고43 본점으로 갔다. 창고43은 체인점을 여럿 운영하고 있는 제법 유명한 소고기 구이 브랜드인데 미역국이나 육개장을 먹으러 점심에 자주 가는 곳이었다. 회식으로도 몇 번 갔지만 (2년 차 직장인이) 저녁식사로 선뜻 사 먹기에는 꽤나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1인분(150g)에 33,000원짜리 ‘창고43스페셜’을 당당하게 주문했다.(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이제는 1인분에 43,000원이 됐다. 오르지 않는 건 내 월급뿐......) 맥주도 하나 시키고, 후식 식사까지 하며 이런저런 질문과, 대답과, 조언과, 설명과, 근황을 나눴다. 시간이 제법 지나고 계산을 하러 일어섰다. 12만 원 정도 나왔다. 갑자기 약속을 잡고 만나 (사회 초년생들 치고는 상당한) 객단가 6만 원의 저녁식사를 마쳤다. 카드를 긁었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날. 여자 친구와 연희동의 유명한 훠궈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지방 출신인 나는 잘 모르지만 연희동, 연남동 일대는 화교 학교도 있을 만큼 예전부터 많은 화상(華商)이 자리를 잡은 곳이라고 했다. 이연복 셰프의 '목란'을 비롯해 유명한 중국식당도 많고 맛으로 이름을 떨치는 오랜 식당들이 많았다. 사러가 쇼핑센터 쪽으로 신호등을 기다리며 서 있는데 동아리 1년 선배와 마주쳤다. 졸업과 동시에 취직한 나와 달리 선배는 조금 더 긴 공부에 뜻을 두고 대학원으로 소속을 옮긴 상황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어디로 가는지 물었더니 자취방에 간다고 했다. 선배에게 저녁 전이라면 우리와 같이 가자고 했다. 선배는 데이트에 끼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나와 여자 친구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다.
찾아간 훠궈집은 쌀쌀한 날씨와 잘 어울렸다. 테이블 위에 살살 끓고 있는 국물도 좋았고 바에는 처음 보는 재료들도 많아 쟁반에 골라 담는 재미도 있었다. 선배와도 졸업 후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업데이트했다. 다른 동아리 선배들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내 동기들은 또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일을 하며 지내는지 카드 게임을 하듯 하나씩 이야기를 교환했다. 기대하지 못한 만남이었지만 생각보다 좋은 저녁 자리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선배 부부를 집으로 초대했다. 선배는 훠궈집 만남 이후 미국 유학으로 고생하며 교수의 꿈을 키웠고 호주에서 오퍼를 받아 조금은 꿈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코로나 19로 호주 입국이 막혀 두 달만 머물기로 한 서울에서 반년을 넘게 지내고 있었다. ‘5인 이상 집합 금지’ 행정명령 때문에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4년 전 시카고 출장 때 선배 부부에게 신세를 졌던 것이 고마워 겸사겸사 초대한 자리였다. 선배는 시카고에서 차로 3시간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마침 내가 출장을 가게 되어 왕복 7시간을 운전해 시카고에서 만났다. 선배는 일부러 하루 시간을 내 시카고 관광 가이드까지 해줬다. 흔치 않은 출장길에 더 흔치 않은 만남이었다.
저녁상에 올린 스테이크를 썰다 시카고에서 먹었던 스테이크 얘기를 했다. 내가 먹은 최고의 스테이크였다고. 그랬더니 선배는 연희동 훠궈 얘기를 꺼냈다. 그날 춥기도 하고 저녁이라 배도 고팠는데 덕분에 따뜻한 한 끼를 보냈다고 했다. 선배가 돼서 얻어먹은 것이 마음이 쓰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옆에 있던 형수도 선배가 아직도 종종 자기한테도 그 이야기를 한다며 거들었다. 누가 계산하는 게 뭐 중요하냐, 나는 시카고에서 더 비싼 스테이크를 얻어먹었는데.라는 내용으로 대답했다. 정말 별일 아니었는데 선배한테는 기억에 남는 일이었던가보다.
여의도 창고43에서 함께 소고기를 썰었던 후배도 언젠가 모임이 있던 날 지나가는 말로 그날 저녁 얘기를 했다. 선배와 마찬가지로 후배도 그날 면접을 보고 마음이 헛헛했나 보다. 후배의 얘기를 듣고 시간은 지났지만 든든하게 먹인 것 같아 뿌듯해졌다. 어쩐지 생각해보니 후배가 그때 이후로 동아리 단톡방에서 총무 역할도 열심히 하고 사근사근해진 것 같다. 이전까지 총무 역할은 주로 내가 하느라 힘들었는데.
나도 그렇다. 내가 누군가에게 훠궈로 기억되고 창고43으로 기억되듯 나도 특정한 시간과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살다 보니 상대방은 큰 의미 없는 일이지만 내게는 고마운 일이 종종 생긴다. 우리 부부에게 특별한 이유 없이 마음을 써주시는 분도 있다. 나이키 신발로 기억하기도, 이탈리안 풀코스 디너로 기억되기도 한다. 이해를 따지지 않는 호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은 생각보다 관계를 견고하고 따뜻하게 응고시키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힘은 모임의 술안주가 되기도 하지만 하루를 더 겸손하고 착하게 살도록 하는 효과도 있다. 물론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돌려줘야 하겠지만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