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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May 10. 2021

나무와 나무, 숲을 꿈꾸다

'키키 키린의 말'을 읽으며

극장 의자에 꽁꽁 묶여 있는 느낌이었다. 눈을 감지 못하고 꼼짝없이 지켜보면서도 보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영화를 볼 때면 그랬다.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길게는 몇 주 동안이나) 다른 이야기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아시스’에서의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그랬고, ‘한공주’에서 그녀가 짓는 표정을 보고 나서도 그랬다. 그리고 오래전 ‘아무도 모른다’를 봤을 때도 그랬다. 선배의 권유로 봤던,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봤던 영화 때문에 두 시간 동안 사로잡혔다. 비틀거리는 의자 다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팬이 됐다.


몇 년 후, 감독은 다시 눈부신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선보였다. 한 가족의 이틀간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는 주인공 아베 히로시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가 이어진다. 하지만 영화의 분위기를 장악한 사람을 따로 있었다. 어머니 역할을 맡은 키키 키린.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인) 심연에 묻어두었던 마음을 간명한 말투로 아들에게 고백하던 장면에서 풍기던 서늘함은 정말 대단했다. 주방의 전등이 그녀의 얼굴을 한쪽은 밝고 한쪽은 어둡게 비췄기 때문일까...... 이후 키키 키린은 감독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실명된 왼쪽 눈 때문에) 서로 살짝 다른 방향으로 가리키는 두 눈동자 덕분일까.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대사에 묘한 분위기가 더해져 영화를 더욱 밀도 있게 만들어줬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움직이지 않도록 바닥에 내려놓은 닻처럼, 때로는 가라앉은 낙엽을 띄워 올리는 신선한 바람처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서 그녀는 영화의 분위기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감독의 수작으로 꼽히는 영화에는 그녀가 있었다. 감독과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어느 가족’(2018.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서 세속과 교양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기도 그녀만의 것이었다.


지난달,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한 책 ‘키키 키린의 말’(고레에다 히로카즈 / 마음산책)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시선으로 그녀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故 키키 키린의 장례식 추도문을 남길 정도로 마음을 가깝게 두었던, 그녀를 향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존경과 애정이 담뿍 담겨 있는 이 책은 두 사람(배우와 감독)이 오랜 시간 쌓아 온 이야기가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故 키키 키린의 편안한 미소가 담긴 사진, TV 활동 시절 이야기의 이해를 위한 엄청난 분량의 미주까지 친절하게 묶인 이 책은 그녀를 그리워하는 팬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나 역시도 두 사람이 찍은 영화 이면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이전에 영화를 보며 궁금했던, 그리고 몰랐던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니들이 모르는 게 맛을 나는 알아버린 느낌이랄까. 감독의 말처럼 그녀는 하나의 롤을 맡은 배우를 넘어 시나리오 전체를 부감으로 바라보고 하나의 동작, 한마디 대사를 추가하는 것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프로듀서’ 같은 사람이었다. ‘어느 가족’의 해변 장면을 설명하는 부분이 무척 좋았는데 그녀가 애드립으로 말한 “고마웠어” 대사 덕분에 영화의 결이 얼마나 풍성해졌는지 뒤늦게 감탄을 터뜨렸다. 마치 육개장 다 끓이고 다시다 살짝 넣어 다시 끓여낸 느낌과 비견할 만하다. 팬이라면 해당 영화와 텍스트를 모두 보는 것을 정말로 추천한다.


사실 대담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대화를 활자로 따라가는 게 버겁게 느껴졌다. 그동안 접했던 대담집의 주인공들이 주로 한국인이었는데도 읽기가 불편했던 것은 결국 내 문해력이 부족해서였을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책 속의 대화들은 큭큭거리며 읽을 수 있었다. 이미 그들의 영화를 여러 편 봤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보지 못했던 그녀의 TV 활동 시절의 이야기도 상당한 분량이니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TV 속에서 활약하던 당시의 이야기는 상세한 미주로 보충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배경지식이 없어 오롯이 즐길 수 없었다. 아쉽다.) 책에는 그녀의 (영화 속) 말투가 그대로 녹아있(는 느낌이)었다. 일본어라고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밖에 모르는 주제에 할 얘기는 아니지만, 정말 키키 키린이라면 이렇게 얘기했겠구나라고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진지함은 별로 없이, 그러나 깊고 날카로운 영화 속 대사들처럼 인터뷰 속 그녀의 말들도 감독의 정곡을 찌르고 때로는 감독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덧붙여 인터뷰이를 향한 감독의 배려와 존경도 읽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줬다.


“The Oscar goes to ~”

그들만의 잔치였던 아카데미 시상식에 한국의 배우가 여우조연상 수상자로 무대에 올랐다. 김수현 작가의 페르소나로 주로 드라마에서 활약하던 배우 윤여정 씨가 21세기에 스크린으로 영역을 넓혀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임상수 감독과의 작업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바람난 가족’에서 동창과 바람이 난 시어머니부터 “아더메치”를 주문처럼 외며 스트레스를 삭히는 가정부(하녀)까지 임상수 영화의 맛을 살려준 역할은 그녀의 것이었다. 덕분에 ‘죽여주는 여자’, ‘찬실이는 복도 많지’, ‘미나리’처럼 노년에도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은 다양한 역할로 연기하고 있다.


‘걸어도 걸어도’ 이후 보여준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키키 키린을 작업을 보며 임상수와 윤여정을 떠올린 것은 지나친 것일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윤여정 씨의 다음 역할을 기대할 수 있지만, 키키 키린의 다음 역할을 만날 수 없다는 점이다. 앞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그녀를 대체하는 것은 누구일까, 대체는 가능할까, 대체할 수 없다면 감독은 이제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까, 극의 품격을 높여줄 수 있는 조력자는 누가 될까, 감독도 관객들과 같은 고민일까. 유작과도 같은 '어느 가족'의 그녀의 한마디가 오래 남을 것 같다. 


“(다들, 고마웠어)” 


* (팬들은 아시겠지만) 이 짧은 글의 제목 '나무와 나무, 숲을 꿈꾸다'는 그녀가 직접 지은 본인의 예명 '키키 키린'의 한자(樹木希林)를 풀어놓은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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