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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Apr 26. 2021

고작 낮잠 자는데 반차를 태워?

반차를 냈다. 역시 오전보다는 오후 반차가 좋지. 오전 반차는 내 휴가 숫자만 깎일 뿐 쉬었다는 느낌이 없다. 고향에 제사가 있다고 이유를 둘러대고 팀장의 결재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 남들이 점심을 먹으러 서둘러 로비를 나갈 때 나 혼자 유유히 택시를 타는 기분은 고딩 시절 야자를 빼먹을 때보다 짜릿하다. 마침 하늘도 유난히 파랗지 않은가.


반차 덕분에 평일 오후 여유시간이 생겨 집으로 가기 전 사거리에 있는 국민은행에 들러 통장을 이월했다. 얼마나 한참 동안 이월을 안 했는지 새로 받은 통장은 거래내역이 6페이지까지 넘어가 있다. 한두 달만 있으면 다시 이월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때는 무슨 핑계로 휴가를 써야 할까. 미리 고민해야 그때 가서도 자연스럽게 휴가를 낼 수 있다.


점심은 은행 옆에 있는 버거킹에서 와퍼 주니어로 해결했다. 격주로 카톡에 이벤트 알림이 오는데 이번에는 와퍼 주니어가 행사품목이다. 혼밥을 어색해하지 말자. 지금은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오후 반차 시간이다. 최대한 간단히, 간략히, 가볍게 해결해야 한다. 반차를 낸 소중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거리를 건너 집으로 가는 길. 여자친구와 자주 갔던 파스타 식당이 치킨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언제 바뀌었을까 잠시 의아해한다. 장사도 꽤 잘됐는데 왜 없어졌지. 장사가 잘되니 주인집에서 내쫓고 아들한테 식당을 차려줬나? 요즘 출퇴근 동선을 바꿨더니 나와바리 업데이트가 안됐구나, 하며 모퉁이를 돌았더니 구두샵에서 가판대를 내놓고 재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항상 내 퇴근시간보다 일찍 문 닫는 가게인데 오늘은 반차 덕분에 이런 행운이 있구나 감탄한다. 매일 출근길에 눈길을 보냈던 버건디 컬러의 팁토 한 켤레를 집어 들었다. 12만 원... 10만 원이라면 정말 좋을 텐데. 정가는 29만 원이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조심스레 네고를 던졌다.


네고는 통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12만 원으로 ‘나름의 득템’을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1시 40분.


화장실 앞에는 아침에 씻고 나오며 던진 수건이, 그 옆에는 머리를 말리고 코드를 정리하지 못한 드라이어, 싱크대에는 어제 먹고 쌓은 그릇이 그득하다. 뭣이 중허겠나. 휴대폰에서 음악앱을 켜고 Travis의 ‘3 times and you lose’를 플레이한다. 가사는 잘 모르지만 오늘 같은 맑고 따뜻한 날에 잘 어울린다고 항상 생각했다.


수건과 드라이어는 다리를 갈지자로 툭툭 차서 대충 치운다. 왼발을 이용해 오른발 양말을 벗는다. 또 정확히 오른발을 사용해 왼발 양말을 벗는다. 발가락으로 집어 빨래 바구니에 던진다. 한번에 골인. 바지도 벗고 셔츠도 벗는다. 방바닥에 있던, 오늘 아침 출근하느라 벗어두었던 체육대회 기념 셔츠와 반바지를 다시 입는다. 1시 50분. 노래가 다른 노래로 넘어가 있어 이번에는 ‘Closer’를 플레이한다. 아니, 앨범 반복 버튼을 터치한다.


커튼을 활짝 젖히고 창문은 살짝 열어둔다. 그래도 일교차가 큰 날이니까 감기를 조심하자. 창 밖에 제법 연륜을 뽐내는 나무의 가지와 새파란 잎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봄날은 간다’에 나오셨던 할머니가 말씀하신 대숲의 ‘솨솨, 서서’ 소리가 이런 것일까. 창 밖의 나무도 시원하고 맑은 소리를 낸다.


이제 이불을 덮고 눕는다. 벌써 두시. 씻는 시간도 아깝다. 베개를 하나 더 끌어안고 모로 눕는다. 이불은 아랫입술까지 끌어올린다. 단, 발가락은 이불 밖으로 내놓는다.


알람은 맞추지 않는다. 매일 자는 잠은 휴대폰 알람이 5개씩 필요한, 끝이 정해진 잠이지만, 이 낮잠은 기한이 없는 내 맘대로다. 수요일마다 회의 때문에 아침 6시에 일어나 택시를 탈 걱정도 필요없는 잠이다. 끝을 정하지 않아도 되는, 당연히 알람을 맞추지 않는다. 혹시 5시에 깨면 상쾌하게 일어나 여자친구를 데려다주러 가면 되고, 혹시 8시에 일어나면 라면 하나 끓여서 '맛있는 녀석들' 재방송을 봐야지.


그냥 내일 아침까지 쭉 자야지. 걱정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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