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는 달콤한 환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거울처럼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년기를 보낸 90년대 초반, 연속극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었다. 가정주부 캐릭터들이 시장에 가면 십중팔구는 콩나물을 샀고, 콩나물 값 백 원, 오백 원을 깎았다. 새마을 운동의 깃발과 노래가 도처에 있던 70년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난은 주변에 있었고, TV 속 배우들도 콩나물 값을 깎으며 생계의 팍팍함을 보여주던 시절이었다.
유치원에 다니던 어느 날, 내 손을 잡고 시장에 나간 엄마도 빨간 통에 담긴 콩나물을 샀고, 당연히 콩나물 값을 흥정했다. 아버지 월급으로 여섯 식구가 생활하려면 오백 원하는 콩나물 한 봉 지도 사백 원으로 만들어야 했다. 비단 우리 엄마뿐 아니라 당시 시장에 있던 아주머니들의 마음은 한결같았을 것이다. 그렇게 굳은 의지로 가격을 바꿔보려는 엄마 옆에서 나는 지그재그 모양으로 케첩을 바른 핫도그 하나 사달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장을 다 보고 시내버스를 타러 가는 길, 교차로에서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데 엄마가 갑자기 신호등 옆 노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국화빵 가게였다. ‘국화빵을 사주시려고 그러나? 나는 핫도그가 더 좋은데...’ 따스한 김이 피어오르는 빵틀 앞에서 엄마는 주인아줌마에게 손가락을 몇 개 펼쳐 보였다. 주인아주머니는 재생지로 만든 봉투를 펼쳐 빵틀 위에 놓인 국화빵을 담아 건넸다. 국화빵을 받은 엄마는 별다른 말 없이 천 원짜리 두 장을 건넸다. ‘이천 원? 우리 엄마가? 방금 콩나물 오백 원도 깎아서 샀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국화빵 사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그 아주머니가 농아였거든]
“농아가 뭐야?” [벙어리를 농아라고 하는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가게 앞에 써 있으니 알았지]
시간이 흘러 국화빵보다는 햄버거가 익숙한 대학생이 되어 고향을 떠나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수험생활의 부담도 사라지고, 눈치 볼 사람이 없다는 자유로움은 날마다 극장을 찾는 발걸음으로 꽃을 피웠다. 수업을 빠지고 광화문 씨네큐브를 찾은 날이었다. 평소 보기 힘든 유럽영화를 모아 영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그날은 시간표에 무성영화가 있었다. 관객이 많이 않은 평일 극장. 스크린 앞에 앉았다. 종종 자막으로 설명이 나왔지만 사실 자막이 없어도 될 영화였다. 표정, 손짓, 몸짓으로 충분했다. 대사가 필요 없었다. 스크린을 넘어 관객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름다웠다.
그날의 엄마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는 부드럽게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국화빵 아줌마는 끄덕이며 봉투를 펼쳐 국화빵을 담았다. ‘이건 덤이에요’라는 의미로 두 개를 더 쥐어 보였다. 엄마는 가벼운 목례로 ‘많이 파세요’라는 인사를 대신했다.
시장의 시끌벅적함과 자동차 소리로 가득한 그날의 교차로에서 아주 짧은 무성영화가 펼쳐졌다. 콩나물 한 봉지, 두부 한 모는 억척스럽게 깎고 깎았지만 국화빵 한 봉지는 선뜻 제값대로 사준 엄마의 마음을 나는 오래 기억할 것이다.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본 후 어느 날. 학교 앞에 호떡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매일 그 자리에 있는 트럭이었지만 눈길을 준 적은 없었다. 그날은 여자 친구가 배고팠는지 내 손을 트럭으로 이끌었다. 한 개에 천 원, 네 개에 삼천 원이라고 적혀있었다. 트럭으로 걸어가며 ‘한 개씩만 먹자’ 말했던 여자 친구는 갑자기 주인아저씨를 향해 손가락을 네 개 펼쳤다. 가격표 옆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저는 청각장애인입니다. 주문은 손으로 말씀해주세요]
"두 개 주세요"라고 말하려던 나는 가만히 여자 친구와 주인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