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직계존속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기군 Mar 31. 2021

민망해진 팔

첫째 아이가 7살이 됐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아무런 대사 없이 팔만 벌려도 곧장 달려와서 안겼는데 이제는 팔을 벌리면 열에 한 번, 두 번은 오지 않고 자기 볼일을 본다. 그들이 말하는 그때가 벌써 온 건지 마음이 덜컹한다.     


같은 팀에서 일하는 차장님은 11살, 8살 딸을 키우는데 아이가 9살 정도만 되면 안아보려고 해도 엉덩이를 뺀다고 내게 경고했다. 그 순간이 무척 서운한 기분이라며... 그 옆에서 중학교 2학년 딸을 둔 부장님은 더 무서운 경고를 덧붙였다. 자식이 내 말에 반응이라도 해주면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생각만으로도 섬뜩하다. 혹시 나는 어릴 적 몇 살까지 부모님께 안겼을까.     


2003년 11월, 수능을 본 날이다. 시험장소로 배정받은 근처 중학교에서 언어영역, 수리영역, 점심 먹고, 사탐과탐, 영어, 제2외국어까지 수능 시간표에 적힌 모든 과목에 맞춰 문제를 풀고 정문을 나왔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수능을 보기 전까지는 수능시험만 보면 마치 타란티노 영화의 챕터 전환처럼 인생의 챕터가 확 바뀔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마지막 답안지를 제출하고 학교 정문을 나오는데 후련하지도 않고 뭔가 찝찝한 허무함만 남는 느낌이었다.     

 

다니던 학교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곳이었는데 수능 시험날은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가도 된다고 했다. 나름 유학생활이었지만 집은 멀지 않았다.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고 버스로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다만 배차가 자주 있지 않다는 것이 귀찮은 일이었다. 산 위에 있는 시험장은 내려오는 길도 길었다. 가방을 메고 슬리퍼와 두루마리 휴지가 든 쇼핑백을 한 손에 들고 터덜거리며 내려오는데 언덕 아래 하얀 쏘나타가 서 있었다. 아빠차였다. 어떻게 이 시간에 여기에 와 있지? 시험이 끝난 시간이 6시가 채 되기 전인데 사무실에서 이곳까지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아빠는 오후 일과 중간에 땡땡이를 치고 데리러 온 것이었다. 당시에는 임원도 아니라 땡땡이를 치기 힘들었을 텐데 아들이 수능 본다고 눈감아줬나 보다. 아빠는 그곳에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차 밖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차에 타보니 조수석에 언어, 수리, 사탐, 과탐 답안지 출력물이 있었다. 영어 시작하기 전에 출발해서 한 시간 정도 기다렸나 보다.)     


사장님처럼 조수석 뒷자리에 앉아 별다른 말도 없이 집으로 왔다. 사실 찜찜한 시험이었다. 시험 전날 간신히 잠들었는데 새벽 세 시쯤 (다른 학교에 다니던) 중학교 동창 친구가 시험 잘 보라며 전화를 걸어왔었다. (그 전화가 정말 응원인지 엿 먹이려는 수작인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 친구를 아직까지 만난 적이 없다.) 그대로 잠을 설치고 1교시 언어를 봤는데 모의고사랑 기분이 너무나도 달라서 당황했다. 실전은 연습과 달랐다. 모의고사는 하도 자주 봐서 채점을 안 해도 몇 점을 받았을지 맞출 수 있을 정도였는데 실제 수능은 감조차 들지 않았다. 급기야 사탐을 풀면서는 이러다 서울로 대학을 못 가는 건 아닌지, 동네 대학교를 가야 하는지, 재수를 해야 하는지, 재수학원은 서울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답안 번호를 적어 놓은 수험표 뒷면을 가만히 펼쳐 가채점을 시작했다. 아빠는 별 관심 없다는 제스처로 신문을 뒤적거렸고, 엄마는 TV 앞 탁자에 저녁상을 차리고 계셨다. 하필 컴퓨터가 거실에 있어서 엄마 아빠의 소리 없는 주목을 받아야 했다. 제2외국어까지 빨간펜으로 표시를 마치고 점수를 계산했다. 혹시 가형과 나형을 잘못 봤을 수도 있어서 점수가 맞는지 다시 채점했다. 가채점을 시작한 지 15분이나 지났을까. 모든 과목의 점수를 더해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점수가 나왔다. 순간 흥분했는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엄마를 부르며 점수를 말했다. 저녁상에 김을 놓던 엄마는 긴장이 풀린 건지, 재수를 안 해도 되는 점수라서 감격한 건지 반찬을 놓다 말고 와락 나를 안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 엄마를 안아본 일이 없는 것 같다.)     


지난 명절 고향집. 놀다 지친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해서 근처 마트에 다녀왔다. 현관에 들어서니 자식 두 놈이 우다다다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아빠아”를 외치며 첫째와 둘째가 한 번에 품에 폭삭 안겼다. 


“아이고, 너네 아빠 기분 좋겄네.” 엄마가 뒤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리클라이너에 앉아 있던 아빠는 놀란 표정 반, 부러운 표정 반으로 우리를 바라보셨다. 아들만 둘 키운 집에서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니까. 심지어 부모님이 봐주고 있는 조카도 아들이니 나에게 아이들이 안기던 장면은 무척 생경했을 것이다. 


저녁 자리에서 아이들이 안겼던 장면이 다시 얘기됐다. 이야기가 이어지던 중간 아빠가 넌지시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당사자인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얘가 수능 보던 날, 저기 학교 언덕 위에서 내려오길래 고생했다고 한 번 안아주려고 했는데 이놈이 그냥 차에 휙 타버리더라고.”     


Free Hug. 프리허그의 본래적 의미는 포옹을 통해 파편화된 현대인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로 가정과 사회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출처 : 위키백과)     


18년 전, 무뚝뚝하지만 가슴 따뜻한 프리허그가 눈앞에 있었는데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피켓 하나로 안기고 안아주는 세상인데. 아빠는 그것보다 더 큰 용기로 ‘아들이 내려오면 한 번 안아줘야지’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답안지까지 출력해 아들을 데리러 가는 차 안에서 아들한테 어떻게 인사할지 이렇게 저렇게 고민했을 텐데, 결국 아빠의 두 팔만 멋쩍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손으로 주문해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