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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Apr 16. 2021

60년생 김영호씨와 59년생 A씨의 시간

1999년. 김영호 씨는 수중에 남은 돈을 탈탈 털어 겨우 권총 한 자루를 구했다. 총구를 목구멍 깊이 넣어보며 자살을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문득 혼자 죽는 것이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승에 함께 갈 사람을 떠올려 보았다. 여러 사람이 떠올랐다. 그중에서 선배 김 사장을 골랐다. 김영호 씨는 경찰을 그만두면서까지 선배와의 동업에 열과 성을 다했지만 선배가 돌려준 것은 사기와 배신뿐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선배를 찾아냈지만 김영호 씨는 그에게 권총 한발 쏘는 것을 실패하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 우연한 일로 연정을 품었던 옛 연인을 중환자실에서 재회한 김영호 씨는 본인의 망할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지 천천히 뒤돌아봤다. 고요한 강물 속에 일어난 한줄기 흙탕물이 방향을 잃고 흩어졌다. 흙탕물 위로 김영호 씨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1999년. A 씨는 불안했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안락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 한 근 조차 살 수 없었던 가난을 벗어나 식당에서 인당 2인분씩 삼겹살도 사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1년 전 IMF라는 알파벳이 등장했고, 이내 그 알파벳은 TV를 뚫고 나와 A 씨의 주변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뉴스 속 사건이 무서운 현실로 변모했다. 근처 산단에서 일하던 불알친구 한 명이 IMF로 직장을 잃었다. 건실한 대기업에 다니던 처남도 회사를 그만두고 중고차 딜러로 명함이 바뀌었다. ‘과연 나는 괜찮을까. 이대로 가정을 지킬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하루하루 마음이 불안했다. 겨우 얻어낸 안정적인 생활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1994년. 김영호 씨는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이뤄졌다. 경찰을 그만두고 시작한 가구 장사는 제법 잘됐다.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연이은 신도시 확장으로 김영호 씨는 그야말로 가구점 소파에서 앉아서 돈을 벌었다. 일해서 버는 돈보다 주식이 벌어오는 돈이 더 많은 날도 있었다. 곳곳에 세워지는 타워크레인의 모습처럼 날마다 새로 오르는 주가는 김영호 씨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아직 경찰로 일하는 동기들은 언감생심인 중형 세단도 한 대 뽑고, 세 식구가 살기에는 조금 넓다 싶은 32평 아파트도 장만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맑았다.     


1994년. A 씨는 평생의 꿈이던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비록 주택은행 대출이 절반이었지만 어쨌든 자기 이름으로 된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등기부등본에 이름 석자가 박혀있었다. 감격적이었다. 버튼을 한 번만 누르면 금방 방을 따뜻하게 해주는 가스보일러 덕분에 이제는 겨울마다 창고에 연탄을 채워 넣는 불편함과 걱정이 사라졌다. 벽에는 정각마다 시간을 알려주는 뻐꾸기시계가 걸려 있었고, 주방은 새로 산 가전들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주차장에는 얼마 전 장만한 은색 엑셀이 반짝이며 서 있었다. 더 이상 4인 가족이 오토바이 한 대로 위태롭게 다닐 필요가 없었다.     


1987년. 김영호 씨는 만삭의 아내와 아침상에 마주 앉았다. 집은 작고 소박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옆집들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김영호 씨는 집 앞으로 이어진 긴 계단을 내려가야 겨우 출근할 수 있었다. 경찰서 일은 고됐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야근에도, 회식자리에서 노래 한 곡 부르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그래야 했다. 너무 바쁜 나머지 아내의 출산도 지켜보지 못했다.


1987년. A 씨는 샛별을 보며 퇴근했고 새벽달을 보며 출근했다. 농협이라는 직장은 매달 월급을 주는 안정적인 곳이었지만 20대의 남자 직원에게는 고된 일이 연속되는 곳이었다. 낮에는 창구에 앉아 은행 손님을 응대하고, 밤에는 농민들을 위한 각종 비료 포대를 날랐다. 야간작업 후에는 어김없이 소주 한 잔을 걸치고 집으로 가곤 했다. 산길 끝에 가로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집 단칸방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자고 있었다. A 씨는 그 틈에 겨우 몸을 뉘었다. 방이 좁아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없었다.   

 

1979년. 스무 살 김영호 씨는 가리봉동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휴일을 맞춰 야유회를 갔다. 야유회는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모임에 순임 씨가 있어서 따라간 것이다. 박하사탕 포장하는 일을 한다는 순임 씨와 자꾸 눈이 마주쳤다. 사진을 찍는 것이 꿈이었던 김영호 씨는 조심스레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겹쳐 순임 씨를 프레임에 담았다. 잠시 자리를 비켜 강변을 가로지르는 철길 사이 모래톱에 누워보니 내리쬐는 볕이 눈부시다. 김영호 씨는 이 아름다운 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1979년. 대학에 가지 못한 스물한 살의 A 씨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다 입대 날짜를 받았다. 하필이면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인 8월 16일. 시골에 살면서 영어 한마디 배우지 못했는데 자대 배치는 카투사로 받았다. 가방 하나 들고 찾아간 춘천의 미군부대에는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들이 가득했다. 흑인부터 히스패닉, 백인까지. 미군들의 알아듣지 못할 말로 귀가 시끄러웠고, 답답한 마음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A 씨는 쫄지 않았다. 눈빛은 오히려 반짝거렸다.     


영화 ‘박하사탕’은 2000년 1월 1일 0시에 개봉한 무척 오래된 작품이다.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이창동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자 배우 설경구의 사실상 첫 주연작이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청불 영화였던 ‘박하사탕’을 어머니의 도움으로 볼 수 있었다.(엄마가 비디오가게에 전화를 해주면 내가 찾아오는 방법으로) 처음 영화를 본 자리에서 비디오를 다시 두 번이나 돌려봤고, 이후 지금까지 최소 열 번 이상 본 그야말로 ‘최애’영화다. 영화동아리에 몸담았던 대학 시절에도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질문에는 모두 ‘박하사탕’이라고 대답했다.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영화 자체의 매력과 완성도도 뛰어났지만 그보다도 나에게는 아버지의 인생을 간접적으로 대입해 이해할 수 있는 영화라서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돌아갈 곳 하나 없는 절망의 상태에서 두 팔 벌려 절규했던 1999년의 김영호 씨는 어떤 모습으로 현재를 살고 있을까.


59년생 A 씨는 불안하고 어지러웠던 그 시기, IMF가 전국의 아버지들의 목을 조였던 1999년을 무사히 이겨냈다. 직장에서 짤리지 않았고 무사히 아들 둘을 대학까지 가르치는 데 성공했으며 퇴직 전에 아이들 결혼까지 시킬 수 있었다. 몇 해 전에는 정년을 맞아 지금은 자유로운 백수 생활을 즐기고 있다(직장생활을 10년 해보니 정년퇴직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이제야 알겠다) A 씨의 요즘 가장 큰 즐거움은 손주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아들의 모습, 며느리의 모습, 아내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얼굴이 구석구석 묻어 있는 손자, 손녀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얼굴로 날마다 자라고 있다. 볼 때마다 한참씩 자라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라질까 부지런히 액자에 담아 벽에 걸었다.


볕이 좋은 날, A 씨는 리클라이너에 앉아 베란다에 놓인 화분들을 바라봤다. 화분들은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자신이 가진 가장 밝은 색으로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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