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손톱과 발톱을 내가 깎는다. 스무 개의 손톱과 스무 개의 발톱을 깎는다. 토요일 또는 일요일 밤에 깎는다. 보통 목욕을 시킨 후 깎는다. 씻기고 물기를 닦고 머리를 말리고 잠옷을 입히고 나서 손톱과 발톱을 깎아준다. 손톱깎이를 서랍에서 꺼내와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다. 두 녀석 중 가까이 있는 아이를 먼저 불러 무릎에 앉히고 손을 들어 가까이 바라본다.
오른손 엄지손가락부터 손톱을 깎아준다. 새끼손가락까지 마무리하면 왼손 엄지손가락부터 다시. 손톱을 다 깎으면 왼발 엄지발가락부터 다시 시작. 오른발 새끼발톱에서 끝난다. 그러고 나면 두 번째 손님을 다시 무릎 위로 불러 앞선 순서대로 손톱과 발톱을 깎아준다. 중간중간 탁자 위에 털었던 ‘용모단정’ 작업의 잔해를 핸디청소기로 빨아들이는 동안 볼일을 마친 자식 놈들은 어디론가 우다다다 뛰어간다.
서너 살까지는 손톱 깎는 시간이 지루해 몸을 이리저리 꼬던 아이들이 이제는 제법 컸다고 얌전히 잘 앉아있게 됐다. 순서에 맞춰 한 손이 끝나면 다른 손을 건네기도 하고, 일이 바빠서 며칠 작업을 건너뛰면 손톱이 이만큼 길었다며 먼저 손톱깎이를 들고 아빠를 찾아오기도 한다.
매주 아이들의 손과 발을 볼 때는 잘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의 자란 모습이 불쑥 눈에 보인다. 7살과 5살이 된 아이들의 손톱과 발톱이 이제는 제법 커지고 단단해졌다. 시간을 돌려 신생아 시절을 생각하면 놀랍기도 하다. 신생아의 손발톱을 다듬는 일은 상당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잠시 ‘손톱’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손톱이란 ‘손가락의 끝부분을 보호하는 단단한 구조’라고 백과사전에 적혀있다. 그렇다면 발톱도 마찬가지로 발가락의 끝부분을 보호하는 ‘단단한’ 구조일 것이다.
그러나 신생아의 손톱과 발톱은 신체 말단 부위 보호를 위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사무용 클리어파일의 두께, 경도, 투명함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거기에 손톱의 면적도 적고 손가락도 통통해서 손톱깎이를 들이밀 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쉬운 일이 아니다. 행여나 잘못해서 살까지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작업을 해야 한다.
이제는 제법 사람다운 손톱, 발톱 모양을 갖췄다. 당연히 어른의 그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손가락과 발가락의 끝부분을 보호할 수 있는 단단함을 갖췄다. 덕분에 조금씩 전보다 정교한 작업들, 이를테면 요구르트의 뚜껑을 벗겨내는 일, 킨더 초콜릿의 씰링을 벗겨내는 일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됐다. 손톱과 발톱이 커지고 단단해지는 만큼 부모의 역할과 필요도 그에 반비례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손발톱이 자라면서 아이들의 생산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흔적이 짙어졌다. 첫째(7세)의 손톱은 엄마를 닮았다. 판판하고 정방형에 가깝다. 반면 발톱은 나를 닮았다. 그 와중에 엄지발톱은 엄마를 닮았다. 세트로 닮는 게 아닌가 보다. 둘째(5세)는 반대로 손톱이 내 손톱을 닮았다. 엄마보다 곡률이 있고 세로가 가로보다 조금 더 길다. 발톱도 나를 닮았다. 그런데 엄지발톱은 엄마를 닮았다. 도대체 어떤 조화일까. 생물시간에 분꽃의 사례로 배웠던 중간유전이 혹시 이런 것인가.
지난 주말에도 목욕을 하고 아이들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줬다. 서랍에서 손톱깎이를 꺼내며 첫째가 이제는 자기가 해보겠다고 했다. 다칠 수 있으니 조금 더 크면 스스로 손톱을 깎으라고 말렸다. 그랬더니 9살이 되면 본인이 하겠다고 했다. 첫째는 요즘 자립의 기준이 9살이다. 아직 혼자 맡기기 어려운 일을 말리면서 ‘조금 더 크면 하자’라고 말하면, ‘내가 9살 되면 시켜줘’라고 답한다. 9살이 되면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설거지도 해야 하고, 목욕도 혼자 해야 하고, 수영장도 다녀야 하고, 두 발 자전거도 타야 한다. 바쁘다.
아이들은 점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난다. 연필깎이 손잡이를 돌리며 연필도 뾰족하게 다듬을 수 있고, 경사로를 이용해 킥보드로 바람을 가르기도 하며, 노트북에 한글 프로그램을 띄워주면 독수리 타법으로 본인의 이름을 쓰기도 한다. 유튜브로 배운 구구단을 목청 높여 외우기도 한다. 첫째 기준으로 2년이 지나 9살이 되면 손톱과 발톱을 깎아주는 일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시기가 오면 혹시 살짝 서운할까.
“자식은 왜 이렇게 예쁜 것인가. 예쁜 점도 예쁘고 못난 점도 예쁘다.”
웹툰 ‘어쿠스틱 라이프’를 그린 난다 작가님이 이렇게 말했다. 193회차에 쓰여 있는 멘트였는데 그 시절 첫째를 낳았던 우리 부부도 의심 없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의 일은 매일 지켜보는 일. 눈을 뜨고, 손을 움직이고, 기고, 일어서고 걷고, 말을 하고......”
193회 에피소드에는 이런 멘트도 함께 있었다. 나는 출퇴근도 있고 회식도 있어 살뜰히 매일매일 아이를 지켜보지는 못한다. 그리고 쪼잔한 성격으로 인해 위 문장을 살짝 수정해야 내게 대입할 수 있다.
“부모의 일은 자주 지켜보는 일. 눈을 뜨고, 손을 움직이고, 기고, 일어서고 걷고, 말을 하고, 토라지고, 싸우고, 말을 안 듣고......”
글을 쓰기 조금 전에도 첫째와 싸웠다. 장난감을 사러 문구점에 다정하게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남남이 되어 나왔다. 7세와 37세가 서로 말다툼을 하고 삐졌다.
그런데 조금만 더 지나면 아빠가 아니라 친구들과 문구점에 가겠지. 그때는 싸우지도 못하겠지. 분위기를 봐서 화해해야 하나. 얼마 남지 않은 기간동안 손톱과 발톱을 조금 더 예쁘게 깎아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