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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Jul 18. 2021

어느 노래로 기억되는 날

향기로 기억되는 공간, 노래로 기억되는 시간, 미소로 추억하는 계절

지나쳐보면 그렇게 추억이 만들어지는 듯하다.

어떤 배우의 말처럼 조명과 온도와 습도까지 패키지로 묶인 기억에 향기 또는 노래가 포장지처럼 마무리를 한다. 출퇴근길에 휴대폰 갤러리를 들여다보듯 문득 문득 꺼내보게 되는 추억들.      


날씨가 쨍한 토요일 저녁 시간이면 가끔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출근한 토요일이었다. 11시쯤 출근해서 9시쯤 퇴근했다. 그래도 일요일은 쉬는구나. 집 앞에서 초밥을 한 팩 포장해 들어왔다. 토요일은 ‘무한도전’ 방송하는 날인데. 본방이 끝난 지 약 두 시간 정도 지나있었다. 두어 시간만 기다리면 어느 채널에선가 재방송이 나올 테지만, 평소라면 재방 편성표를 찾아보고 기다렸겠지만 그날은 1,100원을 결제하고 방금 흘러간 ‘무한도전’ 본방을 소환했다. 작은 탁자를 TV 앞에 두고 포장한 초밥을 열었다.


로딩이 끝나고 화면에 나타난 무한도전 302회. 멤버들은 새로운 캐릭터 분장을 하고 태안으로 떠났다. 이날의 설정은 시를 쓰는 아카데미 ‘욕망의 장미’ 회원들.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버스를 타고, 대하를 먹으며 돌아다녔다. 멤버들은 시를 쓰는 교양 있는 분들답게 여행 중간마다 자작시를 선보였다. 뮤직비디오처럼. 그리고 박명수(박명자)의 시가 그날을 추억하게 하는 포장지가 됐다. 코스모스 밭에서 두 팔을 휘저으며 춤추던 박명자.  


- 키스도 안 해본 여자 -

남자 찾아 헤매 도는 쓸쓸한 여자

오늘 밤도 그 어디서 외로움을 달래나

눈가엔 주름이 자글자글, 목에는 나이테가 늘어가고

내 나이 마흔셋, 첫 키스 하고 싶어라

뽀뽀도 안 해 본 여자 

사랑을 모르는 여자

외로운 여자

오늘 밤 너하고 사랑할까나


박명수가 춤을 추는 동안 차분한 기타 선율이 흘러나왔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의 테마곡. 영화의 오프닝 속 김혜자처럼 박명수도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이병우의 ‘춤’. 하루의 출근과 퇴근과 때늦은 저녁 식사와 무한도전, 그때의 온도와 습도와 조명까지 기타 연주곡으로 한데 묶였다. 단조의 기타 선율처럼 살짝 슬퍼지기도 했던 것 같다.


토요일 출근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바쁜 일이라면, 해야 하는 일이라면 토요일이 아니라 명절이라도 출근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워라밸이 강조되는 21세기에도 MZ 세대조차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날은 쉽사리 기분이 동하지 않는 토요일 근무였다.


토요일을 여섯 번째 평일 정도로 생각하는 팀장과 함께 모든 팀원들이 대학로에 모였다. 회사의 지원을 받아 모 극단이 준비하는 연극이 있었는데 그 연극의 마무리 리허설에 참관하기 위해 사무실이 아닌 대학로에 모인 것이다.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며 어느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겨울의 초입이었음에도 배우들은 반팔티를 입은 채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지원사업 담당부서의 자격으로 리허설 장소에 갔지만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커피를 사가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연극의 ‘연’도 잘 모르는 팀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용히 구석 의자에 앉아 리허설을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팀의 막내였던 나는 극단의 단장과 배우들과 팀장과 팀 선배들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만 살폈다. 언제 집에 가지.     


배우들에게도 어색하고, 우리에게도 어색한 곤욕스러운 몇 시간이 지나 자리를 파하고 대학로 거리로 나왔다. ‘드디어 집에 가는구나’ 생각하던 순간 팀장은 간단히 회의를 하자며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야 이......’ 팀장은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조금 전 지켜본 연극의 아쉬운 점을 지적했다. 내용이 지원 취지에 맞는지, 이렇게 소극적으로 관리해도 되는 일인지, 우리 팀의 역할을 어떻게 설정할지, 보고는 어떻게 할지와 같은 이야기들. 나는 창밖의 커플들을 바라보며 팀장이 굳이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왜 하는 것일까 의문하고, 굳이 토요일 저녁에 모든 팀원이 참석해야 하는 일이었을까 하는 허무함이 들었다.     


초밥을 우걱거리며 한 시간 넘게 무한도전 방송을 봤다. 무한도전 302회 ‘언니의 유혹’. 2012년 11월 3일 토요일 방송. 압구정 핑키 유제니(유재석), 모태솔로 박명자(박명수), 방배동 노라 정준연(정준하), 올라 정형미(정형돈), 성형미인 길하나(길), 결혼을 앞둔 하모니(하하). 그리고 가이드 노홍철까지. 쉴 틈이 없는 멤버들의 드립과 케미 덕분에 시종일관 깔깔거렸다. 그리고 그 덕에 별 소득 없는 토요일 출근의 허무함도 조금 누그러졌던 것 같다. 


그리고 박명수가 흐르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문제의 그 장면. 순전히 영화 속 김혜자를 따라한 그 장면.(여전히 웹에 클립이 돌아다닌다.) 하지만 박병수의 춤 사이로 늦은 가을의 선명한 저녁 햇살도 보이고, 피었는지도 몰랐던 코스모스도 보였다.(도심에서는 잘 안보이니까) 나도 토요일 출근을 하지 않았더라면, 생일을 앞두고 여행이라도 갔다면 저런 풍광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무한도전 멤버들이 내가 아쉬워했던 시간을 대신 보여주고 있구나. 마침 음악도 상황과 심정에 찰떡이었다. 


그 토요일 저녁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근무조건이 조금 터프한 시기이긴 했다. 무한도전을 대체로 재방송으로 봐야 했던 시절이었다. 어쩌다 생기는 저녁 약속은 대체로 약속 날짜가 임박해서 취소 연락을 해야 했고, 사무실 앞에 흐드러진 윤중로 벚꽃을 밤에만 볼 수 있었던 스물여덟 살의 사계절. 그렇게 흘려보내던 주말이 쌓여 11월이 됐고 생일을 사흘 앞둔 토요일 밤이 됐다. TV 속 무한도전 멤버들은 바닷가로 놀러 갔는데 나는 대학로에서 종일 묶여있었다. 적당히 센티멘탈해진 기분 위에 기타 연주곡 하나가 흘러갔다. 무한도전을 유료 결제하며 잠시 시간을 앞으로 돌려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직장인 사춘기가 슬쩍 지나갔다.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 저녁, 설거지를 하며 창 밖 날씨를 보다 다시 그 노래가 생각났다. 주방에 상비된 스피커를 연결해 스포티파이로 그 연주곡을 재생한다. 이병우의 ‘춤’. 

노래가 시작되면 그때의 기분은 기억나지만 이제 그 시절의 기분으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렇게 노래로 기억되는 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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