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으면 복권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로또보다는 다달이 700만 원씩 나오는 연금복권으로. 슬픈 날이었다.
회사 로비에 8시 30분 정도에 도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8시 전에는 4호선 환승을 마쳐야 한다. 4호선 하행선은 사당까지 가는 열차와 안산 또는 오이도까지 가는 열차가 교차로 운행된다. 내게 사당행 탑승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안산 또는 오이도행을 타야 하는데 늦지 않으려면 6호선 전철을 7시 30분까지는 올라타야 한다. 집에서 역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소요되니 역산해서 적정한 시간에 맞춰 문을 열고 출발했다.
엘리베이터부터 살짝 꼬였다. 지하 3층에서 올라오던 엘리베이터가 우리 집을 거쳐 21층까지 올라갔다. 11층, 8층에 차례로 멈추고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싸한 기분이 들었다. 21층을 향하던 그때 그냥 계단으로 내려가야 했나. 역시 그랬다. 전철역에 도착해 6호선 전철을 놓치고 5분 후 도착한 열차에 탑승했다. 이어 4호선으로 제때 환승하지 못했고 너무도 당연하게 회사 로비에는 계획보다 15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의 나비효과는 15분이었다.
출근길 내내 스마트폰을 들여다봤으니 사무실에 도착해서 전화기를 충전해야 했다. 충전케이블을 노트북 USB포트에 꽂았다. 안 들어간다. 위아래를 뒤집어서 다시 꽂았다. 또 안 들어간다. 다시 원래 방향으로 뒤집어 꽂았다. 들어갔다. 깊은 울분을 느끼며 휴대폰을 연결했다. C타입의 충전포트는 상하 방향이 동일해 USB포트와 같은 좌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연결은 한 번에 성공했다. USB포트의 인간 농락은 일 년에 몇 번씩 겪는 일인데도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팀원들과 점심을 먹고 편의점에 들렀다. 묘하게 양이 적은 점심이었다. 서울우유의 초코우유를 한 팩 샀다. 200ml 작은 팩이 2+1 판매를 하고 있었다. 추억의 맛을 지나칠 수 없었다. 대부분 그런 때가 있지 않나. 너무 달아서 평소에 잘 먹지 않지만 초코우유는 추억의 맛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녹색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 반별로 배달되는 우유급식은 내가 가장 처음 가입한 구독경제 서비스였다. 하얀 우유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남들 다 먹는데 나만 안 먹기도 뭣해서 신청한 우유급식. 종종 컬러우유가 오는 날은 별 이유도 없이 기분이 좋았다. 딸기우유, 초코우유, 현미우유 등.
사무실로 올라와 익숙한 맛, 아는 맛, 추억의 맛, 단맛을 기대하며 우유팩의 양 귀를 벌렸다. 그리고 왼손으로 우유팩 방향을 오른쪽으로 살짝 틀었다. 다시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양 귀를 잡고 벌려 놓은 양 귀를 안쪽으로 조였다. 전완근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힘이 덜 들어갔다. 아, 우유팩의 입구가 한 겹만 까졌다. 실망을 딛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팩을 돌려 다시 양 귀를 벌리고 전과 동일한 과정을 반복했다. 또 동일한 결과가 반복됐다. 1겹만 까진 것이다. 오늘은 무슨 날인가. 탕비실에서 빨대를 하나 가져와 우유팩의 가운데를 손톱으로 뜯고 빨대를 꽂으며 생각했다.
다시 퇴근길. 걷고, 뛰고, 전철 기둥에 기대어 90분을 이동했다. 주요 베드타운인 우리 동네 전철역은 항상 붐빈다. 퇴근길도 마찬가지였다. 전철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출구 게이트 8개에 나누어 신속하게 줄을 섰다. 사람이 모자란 줄도 없고 넘치는 줄도 없다. 그리고 ‘빨리빨리’의 민족답게 누구 하나 불필요한 동작 없이 착착 교통카드를 찍고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흐름에 맞춰 반발씩 앞으로 이동하는데 갑자기 내가 선 줄만 길이가 줄어들지 않는다. 누군가 카드에 문제가 생겼나 보다. 함께 서 있던 옆줄의 사람들은 벌써 저만치 앞으로 빠졌다. 나는 재빨리 양 옆을 두리번거렸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옆줄로 이동할 틈이 없었다. 나도 그렇고, 우리 줄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게이트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은 쏟아져 올라오고 이동할 틈은 없고 그냥 다 함께 줄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 줄도 다시 한 발씩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3분 정도를 걸어 집 앞 슈퍼에서 수박을 한 통 샀다. 수박 없이는 배변이 쉽지 않은 둘째를 위해 아내가 카톡으로 전한 주문 사항이었다. 여름 과일의 대표주자인 수박이 몇 년 전부터는 근로자의 날 즈음부터 마트에 보이기 시작하더니 작년부터는 만우절부터 마트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출하가 시작되고 두어 달 지난 지금(6월 말 ~ 7월 초 현재)은 어느 수박을 사도 맛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피크타임’이다. 심지어 요즘은 스티커에 수박의 당도가 표시되어 있다. 이번에도 의심하지 않았다. No doubt.
주방에 도착해 반으로 가른 수박은 의심이 필요했나 보다. 수박은 오이에 가까운 맛이 났다. 비파괴 당도 선별의 정확도가 100퍼센트는 아닌가 보다. 가운데 부분은 그냥저냥 먹을만했지만 다른 부분은 빨간색 오이였다. 평소 같다면 살뜰히 과육을 발라서 통에 옮겨 담았을 텐데 이번에는 상처 받은 마음만큼 대충 잘라 담았다. 1kg에 130원인 음식물쓰레기 처리 비용이 더욱 아깝게 느껴졌다.
샤워를 하며 하루를 복기했다. 이렇게 슬픈 이야기로 하루를 마무리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분명 하나라도 좋은 일이 있었을 텐데.
그래, 점심 자리가 있었군. 부장님, 두 차장님과 함께 점심에 김밥천국에 갔는데 내가 수저통에서 젓가락을 한 손에 정확히 8개를 집어 들었다. 잡는 순간 느낌이 왔다. 팀에서 막내인 사람들은 대부분 알겠지만 한 번에 젓가락을 인원수에 맞춰 들어 올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운이 좋았다.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제는 제법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했다. 요즘 줄창 듣는 노래는 이날치의 ‘여보나리’. 흥겹게 샤워를 마치고 물기를 닦았다. 머리부터 아래로 순서에 맞춰 수건으로 닦는데 발등에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후딱 떼어버리기 위해 샤워기를 들고 수전의 레버를 돌렸다. 아, 머리 위에서 물이 쏟아졌다. 손에 든 샤워기가 아니라.
복권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