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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빛나 Oct 06. 2022

저의 장래희망은 OOO입니다.

꿈꾸는 어린이

- 미취학 아동

어른들은 어린 여자애를 앞에 두고 장래희망을 그렇게 물어보았더란다.

빛나야, 너는 나중에 어른이 돼서 뭐가 될 거야, 꿈이 뭐니?


어른돼서? 꿈?

어린 여자애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말하면 되는 건가. 나는 동생이랑 인형 놀이하고 엄마가 해주는 밥 먹는 게 좋은데. 계속 그거 하고 싶은데. 나중에 내가 자라면 뭘 더 해야 한다는 말인가?


저는 인형놀이가 좋아요.

아직 엄마 밥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지만, 어른들은 '아니 아니 그거 말고 되고싶은거 있잖아'라는 반응을 보였다. 어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여자애는 이내 어른들이 흡족해할 만한 대답을 찾아냈다.


저는 대통령이 될래요

우와 여자 대통령 멋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대통령! 훌륭한걸!


저는 가수가 될래요

그래그래 우리 빛나가 동요 잘 부른다며! 한곡 해볼까? 하나 둘셋넷~


꼬맹이의 맹랑한 출사표를 들은 어른들은 만족하는 듯했고, 착한 여자애는 우쭈쭈 하는 어른들 반응에 조금 으쓱해졌다. 장래희망이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이 좋아하니까. 장래희망 질문에 대한 정답은 인형 놀이하거나 엄마랑 밥 먹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사람을 말하면 되는 거였다.

 



- 초등학생


담임 선생님은 장래희망을 발표하라고 했다. 내가 한 대답들은 차곡차곡 생활기록부에 써졌을 텐데 누군가 그 리스트를 보면 참 꿈이 많은 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뚜렷한 꿈도 없는 아이거나. 기억나는 장래희망 리스트는 이렇다.


미스코리아

우리 빛나는 예쁘니까 미스코리아 할까?

오 텔레비전에서 많이 보던 거다. 그래.

저는 미스코리아가 될래요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함함하다고. 부모님의 사랑 표현을 의심의 필터도 없이 몽땅 흡수했던 꼬맹이였다.


피아니스트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아이라면 응당 한 번쯤은 꿈꿔보는 것.

저는 피아니스트가 될래요

체르니 30을 다 끝냈던가 안 했던가. 이사를 하게 되면서 몇 년 동안 다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법의학자

엄마는 CSI 과학수사대를 재밌게 챙겨봤다. 나도 엄마 옆에서 덩달아 즐겨 보았다. 사건을 척척 해결해 나가는 법의학자가 참 멋있어 보였다.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고, 진범을 찾아내는 우리의 주인공!

저는 법의학자가 될래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가 상처나 피를 잘 못 본다는 것을 자각했다. 놀다가 넘어져 까진 내 무르팍도 제대로 보기 어려운데. 죽은 사람의 몸을 탐구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아나운서

글짓기 대회에 나갔다 하면 상을 받아왔다. 글을 곧잘 써내니 '나의 주장 발표' 원고를 써서 웅변대회도 나갔다.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빛나는 글을 잘 쓰고 말을 또박또박 잘하니 아나운서를 해보는 게 어떨까?

다시 꿈꾸는 어린 여자애가 컴백했다.

저는 아나운서가 될래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나운서들처럼 예뻐지려면 성형수술 이란 것을 조금 해야 할 것 같았다.



미국 어린이의 장래희망 리스트. 15위는 슈퍼히어로!



미국 어린이들의 장래희망 인기 리스트에는 독특하게도 슈퍼히어로가 있단다. 저는 커서 캡틴 마블이 될래요 아이언맨이 될래요 하는 지구 저 편의 꼬맹이들. 슈퍼히어로가 장래희망일 수 있다고? 그 애들은 아마도 생활 속에서 슈퍼히어로물을 자주자주 접하고 있을 테다. 마치 90년대 평범한 한국 꼬맹이가 텔레비전에서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많은 슈퍼스타를 보고 그것을 장래희망 삼았던 것처럼. 나라와 지역과 가족이라는 우연하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몸담은 문화를 쏙쏙 흡수하며 자라나는 어린이들.


그런 면에서 나는 주변의 기대를 크게 주입받은 어린이는 아니었다. 어른들 한마디에 이랬다 저랬다 하던 애가 무슨 말이냐고? 그러니까 장래희망이 저렇게 매번 바뀌어도, 또 없더라도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거다. 스스로 무엇 하나 푹 빠진 분야도 없었고, 엄청난 재능을 보인 분야도 없었고,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해야 한다고 요구받은 것도 없었다.


피겨 스케이팅으로 세계 짱 먹은 김연아가 어느 날 갑자기 젖병을 떼자마자 스케이트장으로 달려갔을까? 아마도 여러 가능성을 찾아보던 부모님에 의해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세계가, 그 타고난 재능을 가진 어린 김연아에게 무대 조명 탁 켜지듯 밝혀졌을 거다. 우리 부모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자식의 천재성을 위해 여러 활동을 폭넓게 경험시켜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여자애 얼굴에 상처 날라 다리를 다칠라 롤러스케이트도 못 타게 할 정도였으니까. 부모님에게는 래미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전빛어린이는 야무진 장래희망은 없었지만, 하고 싶었던 대로 동생이랑 인형놀이도 하고 엄마가 차려준 밥도 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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