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꽃 냄새

봄 - 먼저 스며드는

by 기억을 맡는 사람

봄이 오면 마을 뒷산은 사람 손이 닿지 않는 자리부터 먼저 물들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그 먼 분홍빛을 가만히 응시하곤 했다.


뒷산 언덕이 물들던 어느 날 할머니는 커다란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내 손을 잡았다. 계절마다 뒤뜰에서 꽃을 가꾸던 그 손엔 흙냄새가 배어 있었다.


“혜영이, 할미랑 참꽃 따러 가자.”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오솔길에는 작은 관목들이 새순을 한창 돋우고 있었고 숲은 새소리와 풀잎 스치는 소리로 가득했다. 얼었던 개울물은 몸을 풀고 반짝이며 흘러갔다. 산들바람이 할머니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에도 내 붉어진 뺨 위에도 잠깐 내려앉았다가 스쳐갔다.


싱긋한 풀내음 사이로 은은한 향기가 섞여 들었다. 나는 숨을 들이마시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직 꽃은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옮길수록 공기는 점점 달라졌다.


작은 언덕을 넘자 꽃이 가득한 평원이 나왔다.


“와.”


탄성이 절로 새어 나왔다. 내 눈높이까지 자란 진달래나무들이 바람에 살랑이며 꽃잎을 흔들었다. 그 옆에서 할머니는 손을 뻗어 꽃송이를 톡톡 땄다.


“너무 많이 따면 안 돼. 바구니를 채울 만큼만 따야 한다.”


할머니는 꽃나무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꽃송이를 살살 어루만지듯 땄다. 가지가 꺾이지 않게 뿌리를 밟지 않게 활짝 핀 꽃송이를 한 계절만 빌리듯이.

그 순간 새소리도 바람 소리도 멀어졌다. 할머니와 나의 숨소리, 은은한 향기만이 우리 주위를 가득 메웠다.

왼손으로 가지를 받치고 꽃송이를 하나씩 따는 할머니의 손은 열이 나던 어느 밤을 떠올리게 했다.


일하러 나간 부모님 대신 땀에 젖은 내 이마를 짚어 주고 물수건을 올려 주던 손. 탈이 난 내 배를 둥글게 쓰다듬던 손.

나는 꽃빛에 감싸인 할머니를 오래 바라보았다. 손이 야무지면서 고왔다던 처녀 시절의 할머니가 어른어른 비쳤다. 그곳에서 시간은 느리게 때로는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바구니 한가득 꽃송이를 채우고 내려오는 길에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바구니를 머리에 인 할머니의 손을 잡고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따지 않고 남겨 둔 작은 꽃송이들과 바람에 흔들리던 빈 가지가 잔상처럼 남았다. 그 빈자리에 다시 꽃송이를 피워 올려 주기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빌었다.

산에서 내려오자 공기의 흐름은 달라졌다. 도로 냄새와 벽돌 냄새 사이로 익숙한 생활의 냄새들이 전해졌다.


나는 바짓단에 묻은 흙을 털고 접어 올린 팔의 소매를 내렸다. 옷에선 흙냄새와 함께 은은한 싱그러움이 배어났다. 남겨두고 온 참꽃은 어느새 부드러운 향기 한 조각을 내게 붙여 두었다가 이내 공기 중으로 섞여 들었다.

할머니는 꽃송이를 차가운 물에 담갔다. 물기 머금은 꽃들을 바구니에 담아 털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오후의 따스한 빛줄기 사이로 꽃빛을 머금은 물방울이 잠시 반짝이다가 스미듯 사라졌다.

할머니는 꽃바구니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흰 사기그릇에 쌀가루를 수북이 담고 물을 조금 부어 반죽을 만들었다. 둥글게 뭉친 반죽을 떼어 손바닥 사이에서 굴리자 하얀 경단이 쟁반 위에 나란히 놓였다.

프라이팬이 달아오르고 기름이 퍼지자 할머니는 경단을 올려 앞뒤로 노릇하게 구웠다. 반죽이 어느 정도 익어갈 무렵 꽃송이를 하나씩 얹고 손끝으로 살짝 눌렀다.

구수한 쌀 냄새와 잔잔한 향기가 어우러져 부엌 안에 봄이 차올랐다. 할머니는 말없이 꽃송이를 올리고 또 올렸다. 어느새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화전이 접시 한가득 쌓였다.

꽃나무에서 빌려온 꽃들이 할머니의 손에서 다시 피어났다.

나와 동생은 눈으로만 보던 꽃을 먹는 것이 낯설어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접시 위로 오른 하얀 김이 코끝에서 맴돌았다.

“봄에 피는 참꽃은 약이란다. 어서 식기 전에 먹어야지.”

할머니는 화전에 조청을 찍어 우리 입에 하나씩 넣어 주었다. 묵직한 단맛이 퍼지고 뒤이어 씁쓸함이 길게 남았다. 우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삼켰다.

여린 꽃잎에는 겨울을 건너온 생의 기운이 스며 있었다.

남은 화전은 모두 할아버지의 안주상에 올랐다. 할아버지의 푹 팬 뺨에도 어느덧 분홍빛이 어렸다. 부엌 창으로 들어온 늦은 햇살이 그 빛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