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흔들려도 괜찮은 나이
셋, 둘, 하나!
“적토마의 해, 병오년의 해가 열렸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고, 남편과 삼 남매가 안방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렇게 새해가 왔다. 어김없이 시간은 아무 말 없이 흘러갔고, 우리는 또 한 살을 더 먹고야 말았다. 손톱만큼 보이는 롯데타워 너머로 폭죽이 터지고,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웃었다. “우리, 26년에는 더 행복해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은 말을 했다.
마흔, 마흔 하나. 이상하다. 뒤에 숫자 하나가 더 붙었을 뿐인데 마음은 자꾸만 시큰해진다. 문득 얼마 전, 친한 언니의 말이 떠오른다. “마흔부터는 나이를 안 세게 돼. 세고 싶지도 않아.” 마흔일곱이 된, 여전히 귀엽고 예쁜 그녀는 “나 이제 곧, 반백 살이야!” 하고 웃다가 금세 슬퍼했다. 동안이니까 괜찮다고 말했지만, 놀라움을 숨기지 못한 내 표정을 언니는 이미 읽었을 것이다.
엄마는 내년이면 칠순이고, 동생은 서른여섯. 아이들은 열여섯, 열다섯, 열셋. 남편은 마흔둘, 나는 마흔 하나. 숫자로 늘어놓고 보니 세월은 정말 속절없다. 나도 나이를 먹는구나. 사람은 태어났으면 나이를 먹고, 언젠가는 죽음 앞에 선다. 그 단순한 진리를 이제야 몸으로 배운다. 한없이 어렸던 내가, 아빠가 세상을 떠났던 나이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시간은 더 이상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세월의 선배들은 나를 부러워하고, 불혹을 건너는 나는 삼십 대를 부러워하며, 삼십 대는 다시 이십 대를 그리워한다. 그렇게 우리는 늘 지나온 쪽과 아직 남아 있던 쪽 사이에서, 서로의 시간을 부러워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마흔을 더 이상 넘겼다거나 잃었다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조금 깊어졌고, 조금 무거워졌으며, 무엇을 덜어내도 되는지를 알게 된 나이라고 말해 보기로 했다. 공자는 《논어》에서 사십을 불혹이라 불렀다. 흔들리지 않는 나이. 하지만 나는 불혹에도 많이 흔들렸고, 지금도 흔들리고 있으며, 아마 앞으로도 흔들릴 것이다. 다만 이제는 안다. 불혹이란 흔들리지 않게 되는 나이가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어디로 돌아와야 하는지를 잊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단단해지는 일이 아니라, 돌아올 자리를 마음속에 남겨 두는 일이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나무는 없고, 비를 맞지 않고 자라는 나이도 없다. 어떤 나무는 흔들린 뒤에야 뿌리를 더 깊이 내린다. 나는 그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흔들림을 실패로 부르지 않고,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는 쪽을.
오늘부터는 나이를 셈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오늘을 얼마나 성실하게 건넜는지, 누군가에게 조금 덜 날카로웠는지, 나 자신에게 조금 더 정직했는지를 조용히 헤아린다. 마흔은 도전할 수 있는 나이이고, 흔들릴 수 있는 나이이며, 때로는 부러질 수도 있는 나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 새싹부터 피어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파릇함을 자랑하는 새싹이 아니라, 한 번 꺾여 본 뒤에야 돋아나는, 여물고 깊어진 새싹으로. 이제 나는 그 새싹을 믿는다. 인생은 꺾이지 않는 데 있지 않고, 다시 피어나는 데 있다는 오래된 진리를, 불혹을 지나며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으므로.
글을 쓸수록 문학이 옳은 것과 희망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는 고통을 느낀다. 희망이 내 속에서 우러나와 진심으로 나 또한 희망에 대해 얘기할 수 있으면 나로서도 행복하겠다. 문학은 삶의 문제에 뿌리를 두게 되어 있고, 삶의 문제는 옳은 것과 희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옳지 않은 것과 불행에 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희망 없는 불행 속에 놓여 있어도 살아가야 하는 게 삶이질 않은가.
외딴방_신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