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기념 여행

용기

by 빛날애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진짜 목적이 장소의 변화가 아닌 ‘시선의 변화’라 말했다. 하지만 나에게 여행은 오랫동안 시선의 문제가 아니라 ‘허락’의 문제였다. 가난이 일상의 배경이었던 어린 시절, 여행은 우리 집 식탁 위에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 귀한 식재료 같은 것이었다. 형편에 맞지 않는 사치라는 생각에 나는 스스로 여행이라는 단어를 마음의 메뉴판에서 지워버리곤 했다.

그럼에도 아빠는 어린이날이면 나를 어린이대공원으로 데려갔다. 낡은 필름 사진 속에는 계산기를 두드리던 부모님의 고단한 얼굴 사이로,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웃는 내가 있다. 내 손에는 언제나 캐릭터 풍선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빠의 사랑은 그 팽팽한 풍선 안에 든 헬륨 가스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나를 부풀려 세상 밖으로 띄워 보내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그 공원을 다시 찾았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풍경은 그대로였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장면은 바뀌어 있었다. 여행지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감동은 사실 눈앞의 경관이 아니라, 그 풍경이 비추는 내 마음의 결핍과 닮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4년 전 오늘, 백수 된 날


남편은 금융권이라는 정글 같은 대기업을 뒤로하고, 제조업체의 사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지난 10년을 경주마처럼 달려왔다. 그 10년은 말 그대로 ‘길 위에서의 삶’이었다. 남편은 낡은 차를 몰고 전국 방방곡곡의 현장을 누볐고, 엉성한 체계를 잡기 위해 밤낮없이 서류와 씨름했다. 오직 남편만 바라보는 많은 직원의 생계를 어깨에 짊어진 사장의 핸드폰은 단 1분도 침묵을 허락받지 못했다.

집은 그에게 안식처라기보다 잠시 숨만 고르고 나가는 간이역에 가까웠다. 나는 늘 부재중인 남편의 자리를 ‘성실함’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며 홀로 가정을 돌봤다. 그런 그가 10년 만에 모든 권한을 팀원들에게 넘기고 ‘인수인계’라는 마침표를 찍었을 때, 우리 부부는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었다. 남편이 퇴사를 선언했을 당시 우리의 현실은 지금보다 훨씬 좁고 팽팽했다. 나는 스터디카페 한 곳을 이제 막 궤도에 올리려 애쓰던 초보 사장님이었고, 그 길로 떠난 속초 여행은 10년 치 소음을 끄기 위한 일종의 ‘로그아웃’이었다.


속초에 도착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그저 바다 앞에 서는 것이었다. 겨울의 끝자락, 속초의 바다는 날 선 파란색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10년 동안 남편의 고막을 괴롭혔던 공장의 기계음과 고속도로의 마찰음, 그리고 쉴 새 없이 울려대던 벨소리는 그 서슬 퍼런 파도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남편은 모래사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늘 넥타이를 매거나 작업복을 입고 긴장해 있던 그의 어깨가 바다의 수평선을 닮아 느슨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한 시간에 한 번꼴로 남편의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며 대화를 끊어먹던 ‘신경질적인 침입자’가 침묵하자, 비로소 파도 소리가 우리 부부 사이의 빈틈을 메우기 시작했다.

“여보, 세상이 이렇게 조용했나? 귀가 다 아플 정도네.”

남편은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단순히 소리가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쫓기지 않아도 되는 시간,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타인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정적의 무게'였다.

나 또한 손바닥 안의 작은 화면을 통해 매장의 수익률을 확인하고, 키오스크의 상태를 살피던 팽팽한 긴장의 끈을 동해바다 깊숙이 던져버렸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이 발등을 적시고 돌아갈 때마다, 우리를 짓누르던 10년 치 소음이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해방감 뒤엔 곧바로 생존의 얼굴을 한 막막함이 찾아왔다. 우리는 속초 바다를 보면서도 “이제 진짜 뭐 해 먹고살지?”라는 현실적인 고민을 파도처럼 주고받았다.

속초에서 돌아온 뒤, 우리는 3개월 동안 말 그대로 백수였다. 무권리로 나온 갈빗집부터 식당, 주점까지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저렴하게 나온 스터디카페 매물을 기웃거리고, 텅 빈 홀에 앉아 우리의 다음 생계를 점쳐보던 그 절박했던 시간들. 그러다 운명처럼 마주한 것이 고시원이었다. 공간을 나누고 사람들의 시간을 담는 일은 제조업의 거친 질감과는 또 다른 결의 노동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도전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지금의 우리는 스터디카페 하나와 고시원 세 곳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되었다.

KakaoTalk_20250423_021527335.jpg 4년 전, 속초

속초의 모래사장 위에서 “이제 진짜 백수네”라며 허허롭게 웃던 그날의 우리가, 지금처럼 네 개의 공간을 책임지는 삶으로 이어질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제조업의 쇳소리와 핸드폰 벨소리에 바쳤던 남편이 비로소 ‘무제(無題)’의 상태가 되었던 그날, 우리는 비로소 삶의 다음 페이지를 넘길 준비를 마쳤던 것 같다.

분명한 것은, 그때 속초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완전히 비워냈기에 새로운 기회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성실함이라는 강박을 잠시 내려놓고 떠났던 그 2박 3일의 용기는 내 안에 작은 근육을 하나 만들었다. 멈춰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근육. 그 힘은 재작년 짧았던 제주 여행을 지나, 결국 지난해 가족들과 8년 만의 해외여행이라는 더 큰 용기로 이어지는 단단한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용기를 냈다고 해서 불안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8년 만에 공항으로 향하던 아침, 내 마음은 설렘보다는 ‘혹시 모를 일’들에 대한 방어 기제로 가득 차 있었다. 스터디카페 하나와 고시원 세 곳. 내가 자리를 비운 6박 7일 동안 이 네 개의 공간에서 어떤 변수가 터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방을 싸는 내내 핸드폰 앱을 만지작거렸다.

무인 매장의 사장에게 여행이란, 단순히 몸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축해 놓은 ‘시스템의 안전성’을 시험하는 무대에 가깝다. 13년 전의 여행이 아이들의 기저귀와 분유를 챙기는 ‘돌봄의 연장선’이었다면, 이번 여행은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세상을 믿어보려는 ‘신뢰의 훈련’이었다.

10년의 소음을 끄고 나서야 들렸던 파도 소리. 그 소리를 기억했기에 나는 8년 만의 해외여행이라는 커다란 결심 앞에서도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었다.

“괜찮아, 잠시 멈춰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아.”

6펜스의 은화를 내려놓으니, 비로소 밤하늘의 달이 보이기 시작했다. 네 곳의 매장을 운영하며 다시 6펜스의 세계로 돌아왔지만, 이번엔 달을 보는 법을 잊지 않기로 했다.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 속 질문은 여행 내내 나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진심으로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서 마음 편히 지내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