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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희 May 16. 2023

학생들한테 창의성을 강요하는 교사

창의성이 답일까? 

나는 사립 초등학교에서 8년째 영어를 가르치는 중이다. 영어 수업에서 가끔 프로젝트를 한다. 글을 이어나가기 앞서 내 MBTI부터 말해야겠다. 나는 INFP다. 엠비티아이를 맹신하지 않지만 요즘 엠비티아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다. 


문득 생각해 보니 내가 초등학생들한테 준 프로젝트 과제가 전부 “너의 꿈의 집” 이라던가 “상상 속의 학교” 이런 것뿐이다. 학생들한테 하늘 구름에 떠 있는 무지개 집을 예로 설명했다. 심지어 무지개가 거꾸로 되어 있고 색깔마다 방이라고 했다. 


상상 속의 학교도 마찬가지다. 나는 학생들이 상상의 날개를 펼쳐 틀에서 벗어난 생각을 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이 또한 한 예로 바닷속 학교를 그려 보여주었다. 즉흥적으로 그렸다. 심지어 매일 돌고래 버스를 타고 육지에서 학교로 가야 한다고 설명을 덧붙었다. 내가 흥분해서 설명하면 눈을 반짝이며 본인 꿈의 집을 상상하기 시작하는 제자가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제자도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일수록 더욱 후자처럼 반응했다. 


내가 이러한 예시를 드는 이유가 있다. 학생들이 “너의 꿈의 집”으로 대부분 아파트를 그렸다. 심지어 몇 명은 시그니엘을 그렸다.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초등학생들인데 어떻게 꿈의 집이 아파트가 될 수 있지? 네 머릿속에 바닷속 집은 아예 없어? 그리고 어떻게 시그니엘을 알고 있을까. 비단 시그니엘뿐일까, 수업을 하다 보면 나한테 람보르기니나 에르메스까지 물어본다. 


아니 애들아… 너의 ‘꿈’의 집이라니까. 네 앞에 놓인 도화지 위에는 너무 현실적이지 않아도 되는데.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그려도 된다니까.


우리 학생들의 창의성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다. 영어 말하기 대회나 에세이 대회를 열어도 늘 이런 식이다. 한국 교육의 문제인 걸까.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극 N 성향이라 그런 것일까. 


나는 어릴 때 매일 나만의 집을 상상했다. 내 방에 비밀 통로를 한 백 번 디자인했던 것 같다. 그뿐일까. 나는 해리포터 여자친구가 되기도 했고 반지의 대왕 레골라스와 한 팀이 되기도 했다. 와이 넛?


매년 비슷한 답만 하는 학생들한테 조금 더 창의적인 답을 듣고 싶어서 지난번 말하기 대회 주제로 “내가 가장 기억하는 냄새는?” 냈다. 그럼에도 100명이면 8~90명은 죄다 같은 냄새를 언급했다. 와우. 같은 학원에 다니나. 학교에서 “가장 기억하는 냄새 = 엄마 냄새”라고 답을 알려주는 게 아닌데. 답이 없는 질문인데도 반드시 이게 정답이라고 말해주는, 나도 모르는 교육이 있는 걸까. 그 교육은 도대체 어디서 듣는 것일까. 누군가가 제자들의 머릿속에 매일 밤 수많은 질문에 대한 정해진 답을 주입하는 게 아닐까? 의문이 들 정도다. 


조금만 상자 밖으로 생각하면 흥미로운 생각을 할 수 있을 텐데, 생각 프레임이 거기서 거기다.  


이번 프로젝트 주제였던 꿈의 집 결과물을 걷었다. 그나마 내가 예로 들어준 집들이 죄다 우주나 바다나 이런 비현실적인 것들뿐이라 그런지 이번에는 내가 이겼다. 아싸. 오랫동안 애쓴 결과다. 우선 아파트 그린 친구가 90%에서 10%로 줄었다. 이제 학생들은 나를 잘 안다. 아 티쳐! 좀 그만하세요!라고 할 정도다. 이번에도 꿈의 00이에요? 라면서.  


흐뭇하게 학생들의 엉뚱하고 창의적인 꿈의 집 작품을 하나씩 보다가 들떴던 기분이 급히 다운됐다. 문득 내가 너무 내 스타일을 학생들한테 창의성으로 포장해서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어릴 적 내가 판타지에 빠져 살 때, 포터의 여자친구가 되고 싶다고 할 때 콧방귀를 뀌었던 친구가 생각이 났다. 


'어릴 때는 좀 창의적이고 비현실적으로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해!'라는 나만의 “초등학생은 이래야 한다”라는 관념. 7년 넘게 학교 생활 하면서도 이런 틀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를 인지 못 하고 있었다. 


아니, 초등학생이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게 그렇게 진부한 것인가. 우주 집을 안 그려도, 본인 꿈의 집이 아파트라면 그것 또한 잇츠 오케이. 아직 보고 자란 게 아파트 밖에 없으니까 당연한 사고가 아닐까 싶다. S 성향인 제자들은 내가 내주는 엉뚱한 프로젝트 주제를 들을 때마다 끙끙 앓았겠다. 


요즘 학생들은 나보다 바쁘다. 배워야 하는 공부가 어찌나 많은지. 국어, 영어, 수학, 미술, 태권도, 피아노 등등. 이것들만 넣어도 머리가 꽉 차는데, 뜬금없이 우주나 바다 집을 강요하는 선생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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