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새겨지는 사람
중남미에서는 여아가 태어나면 서비스로 그 자리에서 바로 의사가 귀 뚫어준다. 돌도 안 지난 꼬마들이 작은 양쪽 귀에 귀걸이하고 다닐 수 있어서 부러웠다. 엄마한테 졸랐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초등학생이 귀에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으면 모를까, 귀 뚫은 모습을 보지 못했다. 몰랐으면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렸겠지만, 이민 간 그곳에서 내 나이 또래 친구 중 귀 안 뚫은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그때부터 귀 뚫고 싶다고 노래 불렀다.
얼마나 불렀으면 우리 집 옆집 6호네 아주머니까지 아셨다. 그 집에는 아들 둘만 있어서 아주머니는 여자아이를 키우는 엄마 보고 혀를 내두르셨다. 엄마가 특히 머리 하나는 잘 묶어 주셔서 늘 내 머리는 흩트림 없이, 잔머리 하나 삐져나오지 않고 완벽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아마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보다 손이 많이 간다고 생각하셨을 거다. 그러니 여자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6호네 아주머니가 내 소원을 들어줄 거라 생각도 못 했다.
“아줌마랑 미용실 따라갈래? 거기서 귀 뚫고 와!”
엄마가 제안했을 때 나는 대답과 동시에 6호네로 뛰쳐나갔다.
그렇게 6호네 아주머니가 한인 미용실 갈 때 얼떨결에 따라가서 귀 뚫었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서 귀걸이를 착용한 모습을 상상하면서 기다렸다. 그러다가 막상 날카로운 것으로 살을 뚫는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엄마 앞이었으면 엄살도 부렸을 텐데 하필 6호네 큰아들이 나랑 동갑이라 아주머니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태평하게 기다렸다. 그러고 싶었다.
귀는 순간 뚫렸다.
귀 뚫고 학교에 갔다. 그날은 하루가 그냥 통으로 날아간 날이기도 했다. 종일 어떤 귀걸이를 살지 생각했다. 손이 자꾸 귀로 가서 떠나질 않았다. 안 그래도 스페인어 하나도 이해 못하겠어서 답답했는데 귀걸이라도 생겨서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귀걸이를 돌리는 게 수업 듣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없던 것이 생기니깐 의식이 됐다.
학교 영어 수업 시간에 가족 관련된 단어를 배우고 있었다. 교실 한가운데 앉아 귀걸이를 돌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아들은 SON이라고 설명하셨는데 이미 알고 있는 단어라서 딱 그것까지 머릿속에 들어왔다. 생각의 흐름은 자꾸 귀로 흘렀다.
갑자기 내 이름이 들렸다.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열심히 귀걸이를 돌리던 걸 멈추고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딸이 영어로 뭐냐고 물었는데 딸이 영어로 뭐였지? 생각나지 않았다. 망했다.
그때 나랑 같은 학교 버스 타는 남학생이 큰 소리로 말했다. 평소에 나랑 눈 마주쳐도 나한테 말 한마디 안 걸던 애가 나를 언급하는 게 신기하면서도 가슴이 조금 뛰었다. 뭐야, 귀 만지고 있었는 걸 어떻게 알았지.
“희경이가 자꾸 귀 만지기만 하고 수업 집중 안 해요~”
사람들이 내가 귀걸이를 했다는 걸 알아주길 바랐지만 이렇게 알려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시선이 제게 몰리자 얼굴이 순식간으로 달아올랐다. 선생님은 한국에서 전학 온 나를 나름 배려해서 남학생한테 설명해줬다.
“처음 귀 뚫어서 그렇단다.”
없던 것이 생기면 티 난다. 티가 안 난다고 생각했지만, 교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꾸 귀 만지는 내 행동을 보지 않았을까 싶다.
다행히 선생님은 나에게 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바로 다른 친구에게 답을 말할 기회가 주어졌다. DAUGHTER. 잊을 수 없는 단어가 됐다. 철자가 조금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외웠다. 또 물어볼까 봐.
우리 가족은 IMF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과테말라에 이민 가기로 결정했다. 아버지가 먼저 과테말라로 일 년 가신 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제일 큰 변화는 처음으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카세트 들으면서 공부했다.
그 후 꾸준히 영어를 배웠고, 대학도 직장도 영어와 관련된 것을 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머릿속에 입력된 영어 단어만 해도 수만 개가 넘을 거다. 그러나 단어를 처음 접한 순간을 기억하는 건 그 많은 단어 가운데 DAUGHTER 하나밖에 없다. 귀 뚫은 게 좋아서 계속 귀 만지다가 들켜서 배우게 된 단어라 그런가.
그렇다고 DAUGHTER을 자주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학생들한테 가족을 영어로 가르칠 때만 사용하는 단어다. BE QUIET, EYES ON ME 등 현재 매일 사용하는 단어들은 따로 있다. 현재 많이 사용하는 단어일지라도 내가 처음으로 그 단어들을 배운 순간이 기억나는 게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알고 사용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처음 순간이 있다. 그러나 처음 순간을 모두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인연들이 있다. 함께 시작한 처음이 떠오르지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 함께하게 된 인연들이다. 반대로 현재 자주 보지 못하지만 처음 만난 순간만큼은 늘 생생한 인연도 있다.
첫 순간을 기억하는 건 분명 특별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관계를 정의하지 못한다. 첫 순간만 있는 인연도 수두룩하다. 과거만 있을 뿐 현재와 미래는 없는 인연들이다.
사실 첫 순간을 기억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첫 순간을 맞이한 그 시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뇌에 새길만큼 중요하거나 인상이 깊어야 하나보다. 비록 이후에 사이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첫 순간이 새겨지면 지워지지 않으니깐 말이다.
살면서 과연 몇 명에게 첫 순간을 새길 수 있을까. 생각보다 많지 않다.
처음이든 마지막이든 괜찮으니 누군가의 마음에 새겨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록 자주 꺼내서 사용하지 않는 DAUGHTER 같은 단어일지라도 말이다.
아니, 첫 순간도 마지막 순간도 아니어도 되니 한 순간이라도 새겨질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