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가는 날은 왠지 마음이 자유롭다. 아이 낳기 전에는 1시간 거리의 시험관 병원과 산부인과 진료 가는 것이 피곤한 일이었는데, 매일 육아의 반복 속에 살다 보니 아이를 맡기고 병원에 가는 것이 곧 나들이가 되었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니 몸인지 내 몸인지 모를 정도로 오랜 시간 달라붙어 산다는 것은 엄마의 정신적 소모가 상당한 일이다. 어느 정도 물리적 거리를 두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사실을 보면 말이다.
병원에 다녀오는 날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꼭 점심을 사 먹고 돌아간다. 매일 집밥만 먹는 생활이다 보니 이런 때라도 내가 좋아하는 메뉴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으려 시간을 내본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그동안 먹지 못했던 초밥을 먹기로 했다.
네이버 맛집으로 검색해서 찾아낸 초밥집은 이미 거의 만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행히 자리가 남아 있어 겨우 앉아서 주문을 했다. 역시 많은 후기답게 가격에 비해 메뉴가 참 실하게 나왔다. 나온 모든 음식을 거의 남김없이 맛있게 먹고, 마지막으로 물을 먹고 싶었다. 테이블에 처음부터 놓여 있던 스텐 물병의 물은 왠지 찬물인 것 같아서 종업원께 따뜻한 물을 부탁드렸다. 그런데 내 테이블에 굳이 오시더니 스텐 물병의 겉면을 한 번 만져 보시고, 미묘한 표정으로 주방에 들어가셨다. 좀 이상하단 생각은 들었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고 기다렸다. 곧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셨다. 그러면서
"스텐 물병의 물도 따뜻해요."
라고 말씀하시며 지나가셨다. 그때 순간적으로 아차 싶어 스텐 물병의 물을 만져 보았는데, 따뜻했다.
"어머, 죄송합니다. 몰랐어요."
다른 테이블을 치우시는 그분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씀드렸더니 괜찮다고 대답하셨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뜻한 물을 부탁받았을 때 스텐 물병의 물이 이미 따뜻하니 그걸 드시라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어쩌면 보통의 반응이자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스텐 물병의 온도를 미처 체크 못했다는 상태를 눈치채셨는데도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내가 민망할까 봐 나의 의견을 존중해주신 건 아니었을까. 물병을 가져다 주신 뒤 스텐 물병의 물도 따뜻하다는 걸 알려주실 때도 왠지 기분 나쁜 투가 아니라 모르는 사실을 알려주는 느낌이었다. 나를 존중해주기 위해 굳이 피곤한 일을 자처한 그분의 친절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돈을 계산하러 나가기 전 그분께 다시 찾아가서 정중하게 사과드렸다. 제가 잘 몰라서 한 행동이어서 죄송하다고. 그분은 괜찮다며 또 답하셨다. 돈을 계산하고 나오는데, 죄송하다고 말하지 말고 감사하다고 말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쑥스러워서 그런 생각할 여유도 없었지만 말이다.
음식의 맛도 맛이었지만, 나의 실수도 감싸주시던 그분의 친절이 왠지 좋아서 기억에 남는 식사였다. 왠지 마음이 추운 요즘인데, 누군가가 베푼 이런 작은 친절이 참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 온기에 기대어서 오늘의 힘듦을 잠시나마 덜어 본다.
효율성을 생각해본다면 그건 불필요한 행동이다. 누군가가 실수하면 그것을 정정하고, 바로 잡아 주는 것이 맞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다양함으로 가득 차있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분의 행동은 효율적이지는 못했더라도 누군가에게 실수를 해도 존중받을 수도 있다는 따뜻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살아가며 해야 하는 많은 선택 속에 나도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내가 받았던 오늘의 존중을 잘 기억하고, 누군가를 좀 더 감싸주고 사랑해주는 방법을 택하는 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좀 돌아가고 불필요한 일이라도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따뜻함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아니 내 모든 선택의 기본은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설사 그것이 차가운 무반응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말이다.
당당한 선함은 아름답다. 바보 같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베푼다는 생색도 없이 그저 선함에 기반을 둔 행동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운이 좋게도 나는 그런 선함을 베푸는 가족과 친구들이 주변에 있고, 또 종종 오늘 같이 타인에게 그런 선함을 느끼는 일도 있다.
오늘도 내가 살아가야 할 지표를 알려주는 사람을 만났음에 감사하다. 나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당당한 선함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멋진 일인지를 잘 알려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는 차가운 반응으로 돌아온다 해도 나와 우리 가족의 선함은 적어도 그저 베푸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기쁜 선함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