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달 동안 간절히 기도해온 기도 제목 2가지가 있습니다. 요 며칠 그 기도 제목 모두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기도하지 않은 것보다 더 나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은 제 기도 들으시는 거예요? 제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도 했는데, 왜 더 나쁘게 응답해주시나요. 주님 정말 왜 그러세요."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러실 수 있을까요? 제가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반복해서 오래도록 드리는 기도들이 기특해서 꼭 들어주고 싶을 텐데. 그것도 제 자신을 위한 기도도 아니었고, 다른 이를 위해 제 일 같이 드렸던 기도였는데, 더 나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렇게 기도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기도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내가 기도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생각할 텐데, 열심히 기도해왔던 것들이 이렇게 되니 정말 기도의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꽁해있는 마음으로 있는데, 저 깊은 곳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 기도에 응답이 끝나지 않았는데? 너 끝까지 보지도 않고 이러는 거야? 지금 네가 본 것은 예고편에 지나지 않아. 너는 아직도 나를 모르는구나. 지금 너의 기도는 응답되어가는 중일 뿐이지 응답이 끝난 것이 아니란다. 기도를 포기하지 말거라. 내 일이 끝날 때까지 나와 함께 동역하여 주렴. 네 기도의 끝은 보아야 하지 않겠니?"
내가 하나님이라면 이런 괘씸한 녀석이라는 생각을 할 텐데, 하나님은 오히려 나를 깊이 위로해주셨다. 절대 기도의 끈을 놓지 말라고, 나를 기대해달라고. 다독이셨다. 언제나 너의 삶에 최고의 최고로만 응답했던 나를 모르냐며 되물으셨다.
아멘, 믿습니다.
나의 삶은 늘 외롭고 무거웠다. 나에게 의지가 되어야 할 부모님이 오히려 반대로 내게 의지하는 삶이었고, 집안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의지하는 이 삶이 버거웠다. 여전히 크고 작은 모든 문제들의 최종 결정자는 나이고, 나는 지금도 그 삶을 버거워하는 중이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빚쟁이가 내가 있는 고등학교까지 쫓아와서 아이들이 모두 수업에 들어간 화장실에 빚쟁이를 가두고, 빚쟁이와 설전을 벌인 일도 있다. 부모님의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학교의 모든 친구가 당연히 누렸던 농어촌 특별 전형을 나 혼자 받을 수가 없었다. 시골에서 농어촌 전형도 없이 몇 배는 어려운 수능의 관문을 통과하며, 나는 부모님을 참 많이도 원망했다. 어느 날 하교하고 들어온 뒤에 보았던 빨간딱지. 집안에 돈 될만한 모든 물건에 붙여져 있는 그 빨간딱지. 드라마에나 나오던 빨간딱지를 실물 영접한 적도 있다. 역시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던 부모의 이혼과 별거, 죽음. 그 모든 것을 겪으며 수없이 자살을 생각했다. 밑바닥 같은 내 인생이 싫었고,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친구들의 삶을 보면 비참했다.
불행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가난했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꿈을 이루고, 그 꿈의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나는 빚 독촉장을 받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아빠 사후의 빚을 상속받게 되었고, 엄마의 실수로 그 빚을 법으로 면제받을 시기를 놓쳤다. 나라 금융정보 공사라는 곳에서(사채업자들의 빚을 헐값에 사서 채무자들로부터 대신 돈을 받는 곳. 내게 그들은 사채업자와 전혀 다름없었다.) 내게 아빠의 상속 빚을 받기 위해 독촉하기 시작했다. 20대 중반에 빚 때문에 재판에 서보는 일을 겪게 되었다. 판사는 당연히 나라 금융정보 공사의 편을 들어주었고, 그들의 빚 독촉은 점점 심해져서 나중에 월급을 모두 차압당하는 일까지 생겼다. 라면 하나 사 먹을 500원도 없이 살아가던 시절.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 춥다. 그때도 나는 자주 자살을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불행을 좀 벗고 살 수 있겠다 싶은 순간 불행은 다시금 내게 손을 흔들었다. 결국 그 불행에서 건지시고, 모든 빚을 갑자기 신기한 방법으로 해결해주시고, 내 삶을 원상 복구시킨 놀라운 간증들이 있지만, 오늘은 그런 간증을 하는 글이 아니므로 이쯤에서 넘어가려 한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 삶이 밑바닥을 전전하던 그런 보잘것없고 불행했던 삶이었다는 것이니까.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들어 쓰셨다. 집안이야 어떻든 하나님은 내 안의 재능들을 발휘하게 만드셨고, 나의 능력을 사용하여서 어려웠던 내 삶을 일으키셨으며, 나를 통해 우리 집안까지 일으키셨다. 지금은 모두가 각자 자신의 삶의 위치를 잡고 견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지.
나는 연약한 사람인지라 은혜는 자주 잊혔고,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하고 불행한 집안에서 태어났을까, 나는 왜 부모님의 기도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내가 기도하고 도움을 주어야 하는 입장인가 원망할 때가 많았다. 내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친구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게 너의 복이야. 기도받을 사람이 집안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 집안의 불행에 함께 휩쓸려 가는 사람이 아니라 집안의 불행을 끝내는 사람.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사람. 네가 그런 사람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왜 감사하지 못하니."
생각해보면 그랬다. 나는 우리 가족을 넘어 우리 집안 전체에서 가장 잘 된 케이스였고, 집안 안에서도 내 말에는 권세가 주어졌다. 집안 모두가 내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이란 걸 인정하고,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모두 진지하게 존중해주었다. 요셉과 같이 한 집안을 들어 올릴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택해주셨다는 것에 나는 자주 감사를 잊고 있던 것이다.
방탕하게 살아가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내 불행한 성장 환경을 딛고 내가 하나님과 세상 앞에 존귀한 삶으로 변화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내 기도를 잊지 않으셨던 할머니의 힘이 컸다. 우리 집안의 모든 것을 감당해주던 그 불씨가 이제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 80대이신 할머니는 아직 정정하시지만,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노년의 삶을 살고 계시다. 그 불씨를 이어받을 후손이 필요하다.
최근 기도하며, 나는 하나님께서 그 불씨를 이어받을 3대가 나임을 깨닫게 만들어 주셨다. 온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집안으로 만들 그 불씨를 나는 이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불씨를 이어갈 후손을 키워야 할 거룩한 사명이 내 앞에 있다. 나의 딸 호두가, 그리고 그의 자녀가, 그리고 호두의 손주가 그 불씨를 계속 이어가도록 내 기도의 손을 넓게 펼쳐야 한다. 나는 나의 후손들이 이 일을 능히 감당해주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비록 나는 비참한 삶이었을지라도 주님 앞에 쓰임 받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내 후손들의 삶에 주님께서 강력히 임재해주시고, 그 아이들의 모든 시간과 은사를 주님께서 쓰실 수 있길 소망한다.
집안을 다시 세울 자. 무너진 성벽을 세워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금 공고히 만들었던 느헤미야처럼 나 또한 무너질 대로 무너진 우리 집안의 성벽을 다시 세우고, 이 집안을 믿음을 공고히 세울 수 있길 소망한다. 무엇보다 나의 딸, 나의 손주, 나의 증손주들이 그 탄탄한 믿음의 반석 위에서 자신이 주님께 받은 사명을 능히 감당하는 삶을 살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나는 내 할머니처럼 더욱더 무릎으로 자손을 키워야 할 것이다.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돌아보니 하나님 은혜가 없는 시간이 없었다. 마커스의 찬양처럼 지금 여기에 계시며 말씀해주시는 하나님, 내 삶에 역사하시는 신실한 나의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 나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 내 할머니가 그랬듯 내 자손들에게 할머니의 기도가 있어 내 삶이 이렇게 됐어요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