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의 인간 관계
밴드 멤버들과 노는 게 신난다. 가족도 친구도 아닌 그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인간관계이다. 이른바 제3의 인간관계.
우린 방학을 제외한 3월~11월 동안 매주 1회 밴드 연습을 하고 있고, 종종 공연을 한다. 정말 친한 친구보다 더 자주 만나는 사이라고나 할까.
처음에는 남편의 반대가 심했다. 나의 바깥 약속은 곧 그의 홀로 육아로 이어지기에 주1회를 정기적으로 나가는 약속을 허락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런 정기적 약속 외에도 직장인으로서 저녁에 나가야 할 일은 서로 많기에. 남편의 반대는 타격이 컸지만, 아이브 노래의 가사처럼 숨 참고 lovedive 했다. 옆에서 뭐라 하든 말든 해보고 싶은 건 해야 했다.
1년이 지난 지금, 밴드를 시작했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걸 얻었다. 그건 바로 전혀 다른 세상 속의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이다. 나와 마주칠 일도 없고, 나와 밴드 이외에는 관심사가 전혀 다른 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매번 새롭고 놀랍다. 사회에서 만났으면 친구가 되기까지 장벽이 높았을 사람들과 주기적으로 계속 마주치다 보니 새로운 인간상을 맛보게 된다.
밴드 멤버들과 밴드 연습의 고단함을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낄낄대며 승화하는 순간. 그 순간 속에서 오롯이 존재하며 느꼈다. 사람은 사람과의 조화 속에서 참 행복을 느끼는구나. 이들 사이의 공기 속에 있는 내가 좋다. 주마다 강제로 만나며 우린 서로의 취향과 인간성에 대해 알게 되고, 물처럼 빈자리를 매꾸어 준다.
투자에는 분산 투자라는 용어가 있다. 나는 인간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라 생각이 든다. 때론 가족과 친구들 조차도 지치고 힘들게 느껴질 때, 우리에겐 전혀 새로운 이들이 필요하다. 그들 속에서 채워진 에너지는
다시금 남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사랑으로 변환되기도 한다.
나도 그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물과 공기 같이, 말도 없고 저항도 없이 내 곁을 빼곡히 채워주는 존재. 어느 날 밤, 미친 척 보냈던 밴드 모집 신청 메일은 어느덧 내 삶에 또 하나의 소중한 문을 열어주고 있다.
역시 숨 참고 뛰어드는 게 답일까? 나는 42살이고, 아직도 내가 뛰어들 분야가 있으며, 만나야 할 새로운 인간관계가 있다는 것이 기쁘다.
# 함께 늙어가는 기쁨
오늘 부산 아난티 호텔의 예식에 참석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5시간은 걸려야 비로소 도착하는 곳이다. 6시에 일어나 집에서 출발했다.
남도로 내려가는 4월의 기차 여행은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이었다. 분홍 복사꽃과 하얀 벚꽃이 어지러이 피어난 풍경은 봄이 저마다의 곳에서 온전히 존재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렵사리 도착한 아난티에서의 예식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화려한 예식이었다. 실제 벚꽃나무로 장식된 버진로드, 곳곳에 묵직하게 존재하는 생화들, 점점이 코스 요리로 나오는 고급 재료들, 눈앞의 해변 위에서 밥을 먹는 것 같은 풍경.
18년 지기 선배 선생님의 따님 결혼식이었다. 고작 28살의 앳된 아연(가명)은 눈이 부셨다. 같은 아파트에서 초등학생 때부터 보았던 아연이는 여전히 그 얼굴인데, 어느덧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연과 선생님, 그리고 내가 무탈하게 18년을 살아 남았고, 아연의 결혼을 계기로 서로의 안녕을 확인할 후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만큼 좋았다.
이제는 울산으로 전근 간 선생님께서 18년간 나와 연락을 해주고, 18년이 지난 지금도 그분의 대소사를 내가 챙길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5시간의 거리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서로를 신뢰해온 마음, 멀리서부터 오는 고마움을 모아 내게 혼주 가족 바로 뒷 테이블을 지정해주었다고 한다. 아난티 호텔은 창문으로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기에 창문에 가까울수록 좋은 자리인데, 그 자리를 서슴 없이 내어주신 것이다. 멀리서 오는 걸 마다 않는 마음과 좋은 것들을 내어주는 마음이 만난 시간.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쇼코의 미소, 최은영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기차 안에서 읽은 책의 내용은 선생님과 내 관계를 돌아보게 했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나이는 24살. 정말 철딱서니가 없고 안하무인이었던, 내 흑역사의 시절. 그런 나의 객기를 그저 귀엽게 용인해주던 선생님과 그런 선생님에게 마음의 빗장을 환히 열고 속을 남김 없이 보여줬던 나. 그런 우리가 책 속 가득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는 좀 더 세련된 인간 관계 기술을 가졌을지 몰라도 그때의 순수함은 다 잃어버린 것 같다. 만약 선생님과 내가 지금 만났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18년을 서로 그리워하는 사이가 되었을까.
누군가의 삶을 오랜 시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자 선물이다. 함께 늙어가는 일의 감사함을 생생하게 깨닫는 오늘이다.
아마 해외에서의 결혼식이었어도 갔을 나다. 피곤함과 부대 비용은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에게 그만큼 절실한 존재이니까.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 것보다 사랑을 주는 게 더 능력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녀를 이만큼이나 사랑하고 아끼는 내 능력이 좋다. 다정도 병인양 하여가 친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이었는데, 그 다정이 병이라면 매일 아파도 괜찮다. 사랑을 주는 건 정말 큰 능력이니까.
앞의 글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인간관계에서는 미친 뛰어듬이 필요한 순간이 있고, 그 뛰어듬이 인간관계의 새로운 장을 연다. 18년 전 서로에게 겁 없이 뛰어든 우리는 서로라는 새로운 대양을 발견했고, 여전히 발견 중이다.
그녀와의 관계는 내게 다시금 새로운 인간 관계에 뛰어들 준비를 시킨다. 이미 마음의 빗장을 걸어버린 나이지만, 언제든 내게 윤슬의 반짝임을 보여주는 누군가의 바다가 있다면 빗장을 열고 곧바로 뛰어들고 싶다.
그렇다. 늙어죽을 때까지 새로운 바다를 발견해보자. 내 안의 수많은 바다는 가끔씩 몰려오는 쓰디 쓴 상처들을 점점 별 거 아닌 걸로 쓸어버릴 수도 있으니.
폼 잡을 필요도 없고 실수를 해도 아무렇지 않은 그런 친구라면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그저 유쾌하기만 하다. 바보 같은 장난을 치고 끝없이 농담을 해가며 낄낄거리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된다. 사랑을 하거나 친한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그 순간만큼 바보가 되어도 좋기 때문이다.
(중략)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야말로 당신이 소유해야 할 진정한 재산이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