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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Apr 27. 2024

당신은 나에게 똥을 주었지만

적응을 잘 못하고 있어요


“학교 적응은 잘하고 있어?”

내가 요즘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이다. 적당히 대답하며 넘어가면 될 텐데, 이상하게도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솔직하게 답변하게 된다. 


“아니요. 적응 잘 못하고 있어요.”

내 대답에 스스로 민망해서 배시시 웃게 된다. 어디서든 잘 적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타고난 성격이 그렇지 못하다. 가진 모습보다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으나 현실을 툭 인정해 버린다.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입었을 때 하루종일 느껴지는 피곤함처럼 내가 아닌 나로 오해받는 일은 잠깐의 달콤함과 긴 고단함을 안겨준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나는 많은 촉수를 가지고 있는 생물 같은 사람이라고. 한 환경에서 그 뿌리가 뽑혀 다른 환경에 심어지기까지의 어려움을 그 많은 촉수 가득 느끼는 사람이지만, 하나하나의 촉수가 환경에 다시 적응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그 많은 촉수가 모여 또 다른 가능성을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런 상상들을 하면 내가 나를 조금은 수월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오늘도 꿔다 놓은 보릿 자루 같이 늘 엉성하게 무리 사이에 서 있는 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해 본다. 매일 출근하기 싫다는 마음과 격렬히 싸운 뒤에 결국에는 씩씩하게 출근하는 나를 대견하게 생각하고 싶다. 멋진 모습이든, 아니든 그저 매일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나에겐 소중한 일이므로. 




당신은 나에게 똥을 주었지만


올해 방과후학교 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며칠 전 퇴근길에 만난 방과 후 강사님께서 작년까지 방과후 교실에 있던 청소기가 없어졌다고 한다. 괜히 걱정되는 마음에 단체 교직원 방에 메시지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방과후교실에 작년까지 있던 청소기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혹시 그 청소기를 보신 분이 계시다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다음 날 시설을 맡으신 주무관님께서 찾아왔다. 


“그거 방과후 교실 복도에 있는 싱크대 뒤에 있던데, 확인도 안 해보고 없다고 하면 어떡해요?”

“아, 어제 퇴근길에 강사님을 만났다가 청소기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거라 제가 제대로 확인할 시간이 없었네요.”

“하. 그 강사 참 멍청하네.”


누군가에게 ‘멍청하다’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는 주무관님의 언어에 깜짝 놀라고 불쾌했다.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메시지를 올린 내 잘못도 있으므로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가진 않았다. 확인을 해보는 게 좋을 거 같아 방과후 교실로 갔다. 방과후 교실 싱크대 옆에는 정말 청소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할 때 강의하는 시간에만 잠깐 왔다 가는 방과후 선생님은 복도를 살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또한 싱크대 뒷면은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충분히 모를 수 있었다. 


싱크대 옆 의자에 잠시 앉았다. 시끌벅적한 본관과 달리 방과후교실이 있는 별관은 전혀 다른 세계인 것처럼 고요했다. 그 고요가 좋아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주무관님의 거친 언어에 대해 가졌던 불쾌함이 점점 가라앉고, 그 고요와 햇살이 주는 따뜻함이 마음 한 구석에서 서서히 밀려왔다. 


문득 아침에 보았던 김토끼의 만화가 생각났다. 넌 똥을 주었지만, 나의 필터를 거치면 하트가 된다. 그럼 내 안에는 좋은 것만 쌓인다.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카톡을 켰다. 방과후 선생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선생님, 확인해 보니 복도에 있는 싱크대 뒤에 청소기가 있었습니다. 청소기 위치가 바뀌었고, 쉬이 파악하기 어려운 곳에 있어서 힘드셨겠어요.”


선생님이 되도록 미안해하지 않으시도록 여러 생각을 하며 천천히 메시지를 완성했다. 그래도 선생님에게 행간의 여러 감정을 들켰는지 잘 찾아보지 못해 미안하다는 답변이 왔다. 서로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고비가 또 이렇게 잘 넘어간다. 다행이다. 


하루를 지내다 보면 불쾌한 감정이 드는 순간이 종종 있다. 나에게 갑자기 쳐들어온 누군가의 공격성이 내 자신이나 타인을 향하지 않도록 잠시 멈추어서 서서 생각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져본다. 조금만 잠시 숨을 돌리면 충분히 필터를 거쳐 하트가 될 수도 있으니까. 오늘도 그렇게 한고비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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