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가 발레 학원을 가는 날이다. 발레 학원 라이드를 한 뒤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은 50여분 정도. 그 시간에 내가 할 일은 책 읽기 아니면 글쓰기로 정해서 꾸준히 하고 있다. 발레 학원 가까이에서 내가 눈에 띄지 않는 프랜차이즈 카페를 찾는다. 어딜 가도 맛이 일정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적당히 관심 없는 스타벅스가 제격이다. 17시쯤은 카페인 섭취가 위험한 시간대이므로 늘 메뉴를 세심히 고른다. 오늘은 디카페인 플랫화이트이다.
글쓰기를 원활히 하려면 적당한 준비물이 필요하다. 노트북을 들고 다녀보았지만, 너무 커서 피곤했다. 이동식 블루투스 키보드는 타자감이 좋지 않아 없느니만 못했다. 결국 난 언젠가 선물 받은 일자형 블루투스 키보드를 트렁크에 넣고 다니기 시작했다. 크기는 좀 크지만, 노트북보다는 작고, 이동식 키보드보다는 타자감이 좋다. 여러 가지 조건에 딱 부합한다.
내가 물건을 고르는 방식은 머리보다 몸에 치중된다. 아무리 예쁘고 좋은 것이라도 내 몸이 자연스레 그 물건에 대한 불편함을 느낀다면 바로 포기한다. 적당히. 적당히라는 건 가장 어려운 개념이지만, 생각보다 몸의 감각은 적당히라는 감각을 금방 골라낼 수 있다. 몸이란 건 참 위대하고 신기하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러운 몸의 흐름에 따라 내게 알맞고 적당한 걸 골라낸다. 고심 끝에 고른 이 일자 키보드를 오늘 쓰면서 다시 한번 몸의 흐름에 맡긴 선택에 엄지척을 올려 본다.
타닥타닥.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쉼 없이 손가락이 움직인다. 거침없이 키보드 위를 날아다니며 내는 소리가 경쾌하다. 나의 생각을 글로 변환해 낼 수 있는 스스로의 능력이 멋지게 느껴진다. 카페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순간은 삶에서 단연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일 것이다.
#2
내 삶에 밴드라는 큰 덩어리가 들어오며, 점점 사람들과의 약속을 잡기가 힘들어졌다. 너무 삶이 바빠져서 정말 만나야 하는 최소의 인간관계만 유지되고 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라는 걱정이 종종 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토록 일정 부분의 포기가 필요하다는 것 또한 뼈저리게 배우고 있다. 오늘도 친한 선생님들과의 약속 하나를 어쩔 수 없이 거절했다.
아쉽고 걱정되는 마음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꼭 만나야 할 인간관계만 남기고 모든 것이 점점 정리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쁜 사람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며, 억지로 나갔던 여러 약속들이 조금씩 정리되고 있다. 애초에 난 대인 관계를 넓히는 것에 부담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니 긍정적인 면도 있는 것 같다.
삶은 자주 나를 선택의 기로에 세운다. 이미 밴드라는 선택을 마쳤으나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맞을까라는 고민은 선택 이후에도 가끔 나를 뒤흔든다. 정답은 모르겠고, 정답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내가 가장 젊고 예쁜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일들을 하고 싶다. 그게 내게는 밴드 활동이다. 언젠가 나이 든 내가 이 시간을 돌아볼 때 수많은 모임의 순간은 기억을 못 할 거 같다. 다만 열심히 밴드 멤버들과 연습하며 공연을 만들던 순간은 잊히지 않을 거 같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매번 흔들리지만, 흔들리는 그대로 나아간다. 정답이 없는 문제는 많은 고민으로 과정이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괜찮지 않지만, 또 괜찮다.
#3
태블릿을 살지 말지 3년째 고민 중이다. 사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스마트폰만으로도 충분히 정신 산란한 내 삶이 태블릿의 등장으로 더욱 피곤해질 것 같아서이다. 사길 원하는 이유는 글쓰기를 할 때 큰 화면을 이용하고 싶고, 여러 문서들을 전자 형태로 가지고 다니며 보고 싶어서이다. 사고 싶지 않은 이유와 사고 싶은 이유를 고민하면서 3년째 여전히 마음속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100만원이 넘어가는 고가의 물건이지만, 월급쟁이에게는 할부의 마법이 있으므로 사실 금액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있다. 순전히 내 삶을 이 태블릿이라는 놈이 어떤 방식으로 뒤흔들지가 고민이 된다. 한 번 사면 물리는 것은 어려우니까.
고민은 괴롭지만, 내가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 3년 이상 고민하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좋다. 내 삶이라는 나의 영역을 내가 그만큼 소중히 생각하고, 물건 하나 들이는 것도 섬세하게 생각하고 존중한다는 것이니까. 오늘도 그 고민을 하다가 결국 사지 않는 것으로 임시 결론을 냈다. 며칠 뒤면 또 고민하겠지만. 사실 내 마음속 집에 이렇게 고민하는 물건이 거짓말 안 하고 수십 개 있는 거 같다.
평상시 알뜰한 사람은 아니라 나도 이런 내가 웃기다. 필요하다 싶은 건 절대 고민하지 않고 바로 클릭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렇게 고민하는 내가 있기에 확 질러버리는 나의 특성과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것이겠지. 얼마나 다행인가.
Mbti가 유행이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특성의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고, 골고루 특성을 사용하는 방식이 좋다. 물건을 사는 데에 있어서 나는 지독히 즉흥적이기도 하고, 매우 계획적이기도 하다. 각 물건에 따라 내 특성이 달라진다는 건 얼마나 재밌는 일인지.
태블릿에 대한 고민은 사기 직전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쉽게 놈에게 넘어가고 싶지 않다. 매일 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생각하며 계속 방어전을 이어갈 계획이다. 순식간에 함락될 수도 있지만. 이 아슬아슬한 고민을 즐기며 태블릿과 밀당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