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의 감사일기
9월 9일
- 온종일 흘렸던 땀을 깨끗한 물에 씻어내고, 상쾌한 몸으로 노트북 앞에 앉는다. 더위와 직장 일, 육아가 나를 아무리 고되게 만들어도 그 모든 걸 씻은 듯 비워내고 홀가분하게 밤을 맞이한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단지 샤워 하나에 이렇게 기분이 새로워질 수가 있다니. 내게 샤워할 깨끗한 물이 허락되고, 밤이면 편안하게 몸을 누일 공간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그저 감사하다. 어쩌면 내게 필요한 건 그저 물과 누울 공간 정도가 아닐까. 오늘보다 더 힘들 어떤 날이 온다 해도 내게는 씻을 물과 누울 공간이 허락될 것이다. 설사 그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극악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고요한 밤은 찾아오고 잠시라도 쉴 수 있는 시간들이 반드시 올 것이다. 성실히 밤은 찾아온다. 그리고 성실한 쉼도 찾아온다. 반복되는 듯하지만 매일 다른 얼굴로 찾아오는 나의 모든 밤에 감사하다.
- 오늘도 남편의 모임이 있다 한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아이와 함께 시댁에 갔다. 어머니가 구워주시는 소고기를 먹고, 어머니와 함께 아이를 돌봤다. 같이 아이스크림도 먹고, 매일 저녁시간대에 하는 KBS 막장 드라마도 봤다. 아이와 단둘이만 있을 때는 체력이 급격히 소진이 되는데, 이렇게 어머님과 함께 돌보니 참 좋다. 힘든 순간에 찾아갈 시댁이 있고, 그 시댁에 계신 시어머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시는 분이라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 고부가 처음부터 이렇게 편했던 건 아니다. 결혼 초기에는 내가 어머님께 천금 같은 아들과 같이 사는 사람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꼭 자신의 과거와 비슷한,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여성이 된 듯하다. 직장일을 하면서 육아를 하느라 늘 허덕이는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신다. 우리가 함께 살아온 세월만큼 어머님의 관점이 점점 바뀌었고,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어머님이 편안하다. 나에게 진한 동지애를 느끼게 해주시는 어머님께 참 감사하다.
- 예린이의 유치가 세 번째로 빠질 것 같다. 그동안은 이 빼는 것을 하도 두려워해서 본인이 혀로 열심히 밀어내 어쩌다 빠졌다. 오늘은 좀 걱정되어 아이를 치과에 데리고 갔는데, 워낙 겁쟁이라 치과가 떠나가도록 울었다. 의사선생님은 아이의 유치를 보더니 “아주 쉽게 뺄 수 있지만, 이렇게 아이가 공포에 질렸는데 강제로 뺏다가는 치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어요. 집에서 충분히 다시 연습해보시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소득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님께서는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예린이를 설득하여 빼주지는 않으시고 그저 이에 실만 묶어 주셨다. 예린이가 실을 살살 흔들면서 스스로 빼보라는 제안이었는데, 예린이는 실을 묶는 거 자체도 너무 무서워했다.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이가 빠져버렸다. 내 생각에 어머님께서 예린이 몰래 실을 묶는 척하며 살짝 힘을 주신 거 같다. 아이는 언제 빠졌는지도 모르게 쏙 빠져버린 이를 보며 당황했다. 아이가 아픈지 못 느낄 정도로 이는 그저 실오라기만큼만 잇몸과 연결되었던 듯하다. 결국 이 소동은 이렇게 끝이 났다. 아주 이 하나 빠질 때마다 유난의 유난을 떠는 예린이로 인해 매우 피곤하지만, 겁쟁이 예린이에게 무언가를 강제하지 않고 마음껏 겁먹고, 실컷 모지리 행동을 하게 하는 것도 아이의 마음을 위해선 건강한 일이라 생각이 든다. 나도 어릴 때 겁이 많았는데, 모든 분야에서 너무 강제적으로 내몰려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을 때가 많았으니까. 예린이는 가족과 친지 모두 무언가를 강제할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겁쟁이임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다. 마음껏 겁을 집어 먹으면서. 그런 예린이가 부럽기도 하고, 힘들었던 지난 시절의 어려움을 아이에게는 되물림하지 않으려 애쓰는 내가 기특하기도 하다. 예린이의 이 소동을 통해 여러 상념에 빠지며, 나의 과거까지 돌아볼 수 있었다. 이 모든 의미 있는 순간에 참 감사하다.
- 어제 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을 때 세차를 하러 갔다. 외부를 기계가 세차해주고, 밖의 주차장에서 내가 내부를 걸레로 닦고 진공청소기로 청소하는 구조이다. 세차를 매우 귀찮아 하는데, 깔끔한 차가 주는 느낌이 그리워서 처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세차를 했다. 뭐든지 귀찮아 하는 내게 이런 날도 있구나. 내가 철이 든 거 같다. 덕분에 오늘의 나는 매우 깨끗한 차 안에서 행복하게 운전을 했다. 자주 세차를 위한 마음을 먹어야겠다.
- 오늘 아이들과의 사랑스러운 대화 장면
먼저 호영이와의 대화)
선생님, 부자예요?
왜?
저기 전구 박스에 1조라고 써있어요. 1조나 주고 산 거예요?
호영아..........1조는 1세트라는 거야......
아................
두 번째 지윤이와의 대화)
선생님, 저 나머지공부 하기가 너무 싫어요. 진짜 오기 싫어요.
그래? 나도 출근하기 싫은데.
왜요~ 그래도 아이들 가르치는 건 재밌잖아요.
야, 재밌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지겨워. 집에서 누워 있고 싶어.
선생님, 어쩜 그럴 수 있어요. 나 가르치러 오는 건데. 내가 싫어요?
헐..............
호영이와 지윤이 덕분에 귀여워서 많이 웃었다.
학교 일은 지겹고 힘이 들다. 재미는 찰나이다.
좋지 않는 학구에 위치한 우리 학교 아이들은
하나 같이 사연이 있고, 자주 방치되며 안쓰러운 아이들이다.
그러나 이 지겹고 싫은 학교에서
안쓰럽지만 맑은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살아가고 있다.
내가 그들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자주 절망하지만,
나에게 있어 최선은 그저 그들의 곁을 일관되게 지켜주는 것임을,
그래서 그들에게 또 다른 의미의 안정적인 사랑을 전달하는 것임을 안다.
이제 그 정도가 내 한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교육경력 19년차.
그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사건들로 나는 부딪히고 깎였으며,
이제는 동글동글해진 마음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매일 지겨워하면서도.
지윤아, 네가 좋지만, 출근은 싫어.
그 두 마음을 동시에 받아들인다는 건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야.
그렇지만 지윤아,
나는 싫은 건 싫은 거인 너의 어린 마음이 참 좋다.
나머지공부 매일 싫다고 하면서도
항상 성실하게 과학실로 찾아오는 너에게 늘 고맙다.
졸업이 몇 달 안남았네. 우리 지금처럼 서로를 최선을 다해 사랑해주자.
- 오늘 각 학년마다 단원이 끝나가는 날이라 단원 평가를 많이 봤는데,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아이들 주변을 걸으며 아이들의 상황을 점검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부분에서 아이들이 헷갈려하고 혼란스러워하는지를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옛말에 걷는만큼 내 땅이란 말이 있다. 교실에서도 아이들 사이를 걷는 것만큼 얻는 것들이 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자주 아이들 사이를 걸어다니며 민심(?)의 행보를 예민하게 읽는 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2학기에 새로 바뀌어 들어오시는 특수실무사님과 나는 서로를 계속 파악 중이다. 특수실무사님은 내 수업에 자신이 너무 개입을 하는 것일까 고민하고, 나는 실무사님의 행동 범위를 내가 무의식중에 너무 좁힐까 고민한다. 오늘은 수업 끝나고 시간이 좀 남길래 유민(가명)이의 행동에 대해서 나의 생각을 말했다. 내 생각은 아이가 지금 선생님과 알아가는 시기라 일부러 선을 파악하느라 하는 행동 같으니 제어하려하기보다는 그저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자신도 그런 생각이 든다며 나의 생각을 존중해주셨다. 서로 아이의 발전을 위해 진심으로 고민하고 이야기가 통하는 분이 실무사님으로 오셔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 번 실무사님이 너무 좋으셔서 또 이런 분이 올 수 있을까 좌절했지만, 색깔은 다르나 다른 의미에서 또 좋은 분이 오셨다.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럭키비키한 일이다.
- 창피하게도.... 몇주 전 언급한 시험은 정말 형편 없는 점수를 받아서 이수 자체를 포기해버렸다. 4번째 시험인데, 아직도 90점을 못 넘겨서 참 창피하다. 그래도 아무한테도 이 창피함을 털어놓지 않고, 조용히 다시 연수를 신청했다. 이번에는 미술사 연수이다. 그동안 재미 없어도 사람들이 많이 듣고 추천하는 연수만 듣다가 오랜만에 내가 무척 좋아하는 분야의 연수를 듣는다. 그저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좋다. 진작 이럴걸. 남의 이야기를 듣는 거보다 내가 좋아하는 길을 고집대로 가보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잊고 살았다. 오늘은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그리며 온몸과 마음이 망가졌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예술이란 무엇인가 한참을 생각했다. 무엇이든 깊이 생각에 잠기는 철학자인 내게 미술사 연수는 그야말로 고양이 앞의 생선이다. 점수를 떠나서 미술사 연수를 듣는 거 자체가 너무 행복하다.
오늘은 미술사 연수만 골라 들으며 나중에 가족들과 유럽 박물관 여행을 가서 예린이에게 미술관 가이드를 제대로 해줘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화가들의 생애와 그림 사이의 깊고 깊은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육아는 내게 있는 정수를 뽑아 아이에게 전달해주는 것. 나는 이야기 전달자로서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전달자의 삶이 참 가슴 뛰고 행복하다. 아, 미술사 연수. 진짜 잘 선택한 거 같다. 최근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인 듯.
- 노래가 주는 기쁨이 크다. 오늘 알고리즘이 내게 전해준 노래를 들으며 세상에.... 이렇게나 좋은 음악이?? 라는 마음으로 진한 행복감을 느꼈다. 노래를 온몸과 온마음으로 듣는 내가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