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by 빗소리

하루를 마무리하며, 잠들기 전 씻고 손빨래를 하다가 문득 박완서 작가님의 수필이 생각났다.


해외여행을 떠나게 된 박완서 작가님이 손빨래를 하기 싫어서 여행 날수만큼의 속옷을 가져갔다고 한다. 빨지 않고, 그저 가방에 넣어두고 집에 가서 빨아야지 하며 편하게 지냈는데, 문제가 생겼다. 배낭을 잃어버린 것이다. 배낭 안의 다른 물건들로 인한 불편함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누군가 내 더러운 속옷을 보았을 거란 생각에 몇날 며칠을 잠도 오지 않더란 작가님의 이야기. 읽는 내내 나도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공감되고 걱정이 되었다.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다. 2주간 뉴질랜드 시골에서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는데, 가던 와중에 버스에서 배낭을 놓고 내렸다. 다행히 큰 캐리어는 가지고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으나 배낭에 있던 여분의 속옷을 잃게 되었다. 홈스테이 장소가 깊은 숲 속에 있는 집이라 마트에 갈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그곳에 있는 시간 동안 속옷 두 벌로 살았다. 매일 손빨래를 부지런히 해놓지 않으면 찝찝하게 살아야 했으므로 정말 부지런히 손빨래를 했다. 다행히 내 배낭에 들어있던 속옷은 새것이었다. 돌아보니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추억이다.


짐을 잃어버리는 불편보다 두려운 것은 누군가가 내 삶의 치부를 발견해버리는 것이다. 단순히 배낭을 잃어버리는 것만으로도 발견될 수 있지만, 사실 가장 두렵고 걱정되는 상황은 내가 갑자기 죽게 되는 상황이다. 80년 이상을 살다가 잠든 채로 죽는 것은 모든 이가 원하는 죽음의 이상향이지만, 그렇게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일 것이다. 가장 두려운 죽음은 도적 같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죽음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 죽으면 안된다. 그러기엔 냉장고가 너무 더럽고, 우리집 구석구석이 너무 더럽고, 끄적거려 놓은 내 기록의 잔재들이 부끄럽다. 아, 이 문장을 쓰고 보니 정말 죽으면 안되겠다. 다행히도 이런 생각을 하루 종일 해서인지 오늘 저녁에 갑자기 냉장고 청소를 하게 되었다. 조금은 부끄러운 죽음에서 멀어졌다 위안해본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갑자기 죽을 것을 대비해 아침마다 늘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깨끗한 속옷으로 언제든 닥쳐올 죽음을 준비하듯 내 주변을 잘 정리해두는 것은 내 죽음에 대한 바른 준비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자연스레 죽음에 대해서 오랫동안 사색하게 된 계기가 좀 신기하다. 지난 주 주말에 올케의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그 이후 우연히 '숨결이 바람이 될 때',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라는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숨결이 바람이 될 때'는 암에 걸려 젊은 나이에 죽게 된 신경외과 의사가 죽기 전의 삶을 회고하고, 의미 있는 죽음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모습을 담은 것이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는 100년을 산 기독교인 철학 교수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삶과 죽음에 대해서 쓴 책이다.


나는 기독교인이기에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을 믿는다. 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꽤 오랫동안 생각해보고 착실히 준비해야 한단 생각이 든다. 죽음은 언제든 도적 같이 들이닥칠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죽음은 죽는 과정과 죽은 이후의 내 이름 석자 모두 아름답게 기억되는 죽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하루 하루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최선을 다해 해내고, 내가 섬겨야 할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섬기며 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언젠가 올 죽음을 위해 담대한 마음과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것이다.


일단 냉장고 청소를 했으니 집안을 정리하고, 부끄러운 기록의 잔재들은 하루 속히 제거해야겠다. 그리고 내 사람들과 내 일을 사랑하며 언제 올지 모를 죽음을 매일같이 준비해야겠다.


내 하루가 삶 속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거하길 빈다. 죽음이 없는 삶은 한 없는 가벼움으로 낭비될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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