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autiful

by 빗소리

당신은 당신의 외모를 진심으로 좋아하는가?


이 질문을 나에게 한다면 나는 아직은 '아니오'라 답해야 한다. 어쩌면 '좋아해 보려 하고 있어요'라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답변일까?


그런 답변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의 피부색과 작은 키, 마른 몸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때문에 나는 살면서 정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졌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피부색이 까맣다는 것은 큰 놀림감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 남자아이들의 놀림 속에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원래 그 시절의 남자아이들은 여자 아이들을 놀리는 재미로 산다지만, 막상 그걸 반복적으로 해가 바뀌어도 당하는 나는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중고등학교에 가서는 놀리는 아이가 없었지만, 하얀 얼굴에 대한 선망으로 스스로를 비하하며 힘들어했다. 십 대 시절 특유의 외모에 대한 집착이 낳은 결과였다.


이후 이본, 이효리 등의 피부색이 까만 연예인들이 뜨게 되면서 스스로 선탠을 하며 피부를 태우는 이들이 늘어났다. 시대의 흐름이란 것이 참 재미있다. 그런 연예인들의 등장이 나비효과가 되어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니 말이다. 그 이후로 가끔씩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다. 어디 선탠 샵에 가면 그렇게 예쁘게 태울 수 있냐고. 놀림의 대상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변한다는 것은 참 신기한 체험이다. 미의 기준이 미디어의 영향에 의해 이렇게 흔들린다는 것이 놀라웠다.


작은 키와 마른 몸 또한 스스로를 위축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작은 키로 산다는 것이 살면서 크게 불편함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더 작게 만들 때가 많았다. 특히 나의 직업은 키가 작으면 어느 정도의 불리함을 감수해야 하는 직업인지라 더 힘들었다. 같은 말과 행동을 해도 키가 중간 이상 되는 사람들에 비하여 무게감이 떨어지게 느껴졌다. 특히 내 주장을 힘 있게 펼쳐야 하는 저항의 순간에는 더욱 키 작고 마른 여자의 소리는 한없이 우스워졌다. 그런 상황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절망했다.


다이어트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들으면 정말 화낼만한 일이지만 마른 몸으로 산다는 것도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하고 싶은 건 '날씬하다'와 '말랐다'는 매우 다른 표현이란 것이다. '날씬하다'는 우리가 평소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상적인 몸매를 말하는 것이고, '말랐다'는 야위다의 다른 표현으로 살이 별로 없다는 것을 말한다. 나는 거울을 보는 것이 가끔 힘겨울 때가 있다. 마른 나의 몸을 보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아서다. 적당히 살집이 있어서 건강해 보이면 참 좋을 텐데, 빼빼 마른 나의 몸이 아쉬울 때가 많다.


지금 나는 내 못난 점을 성토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제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 외모를 진심으로 좋아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평균'의 외모에 생각보다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아니 어쩌면 '비정상적'인 외모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연예인은 일상생활에서 쉽게 발견하기 어려울만한 황금 비율을 가진 '비정상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다지 황금 비율이 아닌 것을 감안할 때면 이들의 외모는 가히 '비정상적'이다. 이 비정상적인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이다. 읽으면서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다.


'비정상적'인 외모의 사람들을 보며 대부분의 정상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는 이 슬픈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 또한 그들 중 하나이다. 미디어를 통해 매일 보는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바라보며 거울을 보니 얼마나 서글픈지!


대체 평균적인 외모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 건 어쩌면 전설 속 동물 해태처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존재한다 해도 아주 희박하게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크고 작은 신체적 고민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기를 낳고, 세상을 보는 눈이 뒤집어졌다. 그동안 내가 무심코 해왔던 생각들이 아이의 순수한 눈으로 함께 바라보니 얼마나 편협하고 잘못된 것인가를 깨달았다. 특히 외모에 대한 생각이 그렇다. 평균적인 외모라는 것을 마음속에 그려놓고 한 없이 스스로를 깎아버리는 이 엄마의 못난 모습을 내 딸이 알게 되면 얼마나 부끄러울까.


아이가 커가며, 아이도 세상의 편견 어린 시선에 상처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너는 왜 그렇게 생겼어? 너는 이 부분이 못생겼다. 그런 생각 없는 소리들을 들으며 아파하고, 나처럼 자신을 한 없이 깎아내리는 경험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일단 나부터라도 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신부터 '평균의 외모'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피부, 작은 키, 마른 몸이 아니라 건강하게 보이는 피부, 아담해서 귀여운 키, 단단해 보이는 내 몸을 사랑하자고. 그리고 점점 빠지고 가늘어지는 내 머리숱, 주름이 늘어가는 피부가 보여주는 내 나이 듦 또한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고.


이런 생각을 더욱 증폭시켜준 책인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는 그 사람과 함께한 모든 순간에서 그가 보여준 미세한 떨림과 다양한 표정, 긴장했을 때 움츠러들던 어깨, 해 질 녘 그림자가 진 옆얼굴, 지쳤을 때의 목소리, 들떴을 때면 쭉 펴지던 목선,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힘껏 들어 올릴 때의 팔뚝 등이 하나로 밀도 있게 통합되어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는 지금 바로 이 시점에 내 눈에 들어오는 그 사람의 이미지에 덧씌워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콩깍지'는 어쩌면 알 수 없는 비합리적 힘에 도취된 상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섬세하게 분별한 그 사람의 미적 요소들이 완전하게 통합된, 그 사람의 초상화가 주는 아름다움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훌륭한 화가일수록 스냅사진의 매력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포착할 것이다.


나의 외모에 대한 정보가 나란 사람의 초상화의 전부를 이루지 못한다. 내 외모 넘어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말과 행동, 나의 자세, 내 눈빛, 나의 아우라 등 모든 것이 통합되어 나의 이미지, 나의 초상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변할 수 없는 나의 외모 때문에 힘들어하는 일보다 나의 초상화를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힘쓰고 싶다. 또한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스냅사진의 매력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눈을 갖고 싶다.


나의 딸이 세상의 비합리적인 폭력(외모로 인한)을 당할 때 내 딸이 가진 아름다운 초상화를 말해주고 싶다. 또한 다른 사람의 초상화를 아름답게 머릿속에 그려내는 방법 또한 말해주고 싶다.


그런 내공이 있는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지금부터라도 내 자신의 외모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나가야겠다. 나는 아름답고, 그 어떤 잣대도 나의 아름다움을 잴 수 없음을. 나를 정확히 잴 수 있는 잣대는 나만이 만들 수 있고, 그 잣대로 잰 나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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