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시대와 '다른' 시대

by 빗소리

웃어른과 시간을 보내고 오면 마음이 안 좋아져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이 그랬다. 육아를 시작하니 마음이 안 좋아져 돌아오는 날이 더욱 많이 늘었다.


대체 왜 그럴까. 왜 나는 효도를 하러 가서는 씁쓸해진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걸까.


오늘 있었던 일을 돌아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틀린' 시대를 살아왔고, 나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구나. 우리는 모두 틀린게 아니라 다른 것이구나.


우리보다 이전 세대는 '맞는지 틀린지'가 중요한 사회였다. 산업화 사회에서는 정확한 결과가 요구되었고, 결과를 위해서는 맞는 과정이 있고, 틀린 과정이 있었다. 학창시절의 통지표도 등수로 명확히 기재되었고, 대학의 합격 여부는 숫자인 점수로 결정되었다. 직장에 입사하기 위해서는 '맞는' 대학이 존재했고, 직장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맞는' 답이 존재했다.


물론 지금 세대에도 아직도 이런 부분이 남아있지만, 지금은 훨씬 더 다양해진 답이 요구되어지는 사회라는 점이 다르다. 통지표도 아이 성잘 발달표라는 좋은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는 학교도 있고, 초등학교에서는 더 이상 아이의 성취 수준을 숫자로 표기하지 않고, 문장으로 표기한다. 대학에 가는 길은 다양해졌고, 직장에 입사하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물론 여전히 '맞는' 대학은 존재하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단순한 정보 나열은 컴퓨터가 대신하므로, 직장 일의 상당수는 창의력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동시대에 사는 전혀 다른 인간. 그렇다. 웃어른과 나의 간극이 상당히 컸다. 책에서 우리나라의 성장은 유럽으로 따지면 수백년에 걸쳐 이루어질 변화가 단 몇 십년 안에 이루어진 결과라 한다. 책대로라면 수백년의 간극을 가진 세대가 공존하고 있는 사회인 것이다. 웃어른과 나의 생각의 차이는 가운데 강이 아니라 마치 해협이 놓인듯한 느낌이다.


미세먼지가 나쁨 수준 이상이면 바깥 외출을 잘 하지 않으려는 나에게 어차피 아이 세대에는 점점 마셔야 하는 나쁜 공기인데, 받아들이라는 말씀. 가급적 두 돌 전에는 영상을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인데,어차피 노출되어야 할 영상이면 지금 보나 나중에 보나 무슨 차이냐는 말씀.


어른의 말씀이 틀린 건 아니다. 그저 나와 생각이 다를 뿐이다. 말씀대로 어차피 먹어야 할 미세먼지 좀 미리 먹어도 큰 차이 없고, 영상도 엄마가 힘든 상황에서는 보여줄 수도 있다 생각한다. 하지만 나를 유난스럽다, 틀리다 표현하는 것에는 깊히 마음이 상한다. 이것은 나의 육아다. 나의 성향이다. 내 고유성이다.


사람마다 육아에 중점을 두는 부분이 다를 것이고, 나 또한 예민한 부분, 털털한 부분이 공존한다. 청소, 빨래에 관한 부분은 꽤 털털한 편이어어서 아기한테 미안할 정도다. 전체의 맥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예민한 부분, 취약한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어,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틀린 것 같아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 생각한다.


매번 돌아올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찜찜하고, 비통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당하는 기분이어서이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어른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살아온 시대는 맞다, 틀리다의 시대였고, 그분의 기준에서 나는 틀리다. 잘하는 많은 부분을 모두 뒤로 하고, 그냥 틀리다!


그분의 시대를 헤아리는 것에서 웃어른에 대한 이해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OX의 기로에 선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며 그분이 느꼈을 수 많은 부정과 슬픔의 감정을 읽어본다. 나를 틀리다 생각하며 견고히 세워갈 그분의 '맞는' 성을 생각해본다. 그 성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이름 모를 외로움을 느낄 마음까지.


웃어른은 설득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이해 해야 할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협만큼의 차이를 건너 그분을 설득할 논리와 체력이 내게는 없다. 되돌아오는 그분의 받아침에 상처 받지 않을 심장도 없다. 너스레로 웃으며 할말 안 할말 시원하게 해내는 담력도 없다.


적어도 나는 '다른' 시대에 살며, 내 개성과 취향을 존중 받으며 사는 혜택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시대의 혜택은 그분의 세대가 눈물로 뿌려온 씨앗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나의 상처 받고, 힘들었던 마음을 글로 위로해본다. 부정 당한 슬픈 마음이 아니라 웃어른도 넉넉히 품을 너른 마음으로 잠들고 싶다.


또 다시 상처 받아야 할 상황은 돌아올 것이고, 또 다시 나는 그 분을 이해하기 위해 내 모든 지성과 경험을 총동원해야할 것이다. 갈수록 나아진다는 희망이 오늘의 나를 버티게 한다. 수고했어,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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