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성실이 발목을 잡을 때

by 빗소리

나는 성실함으로 인생 대부분의 위기를 넘겨왔다. 뛰어난 재능은 없지만, 매일 해야 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반복의 힘은 생각보다 세서 매일 조금씩 하다보면 어느덧 예전보다 더 잘하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인생의 성취를 하나씩 얻으며 살아왔다. 매일 해야 할 일을 다 하기 위해 시간을 아껴쓰고, 자야 할 시간을 줄이기도 했다. 체력이 부족해도 의지로 이겨냈다. 그렇게 삼십여년을 열정이란 이름으로 150%, 200% 자신을 출력하며 살았다.


나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었고, 아이도 태어났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한 생명이 내 몸을 빌어 세상으로 나온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내 몸은 더 이상 젊음 하나로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아이가 태어난 뒤 아이를 키우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느라 잠시 자신을 위한 여러 하루 일과를 내려놓았지만, 아이 백일쯤 뒤부터는 다시금 내 발전을 위한 일과를 하나씩 추가하기 시작했다. 육아도 하며 자기 발전을 꾀한다는 것이 때론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내 체력과 정신력을 방전시키며 하는 이 일이 과연 옳은 것일까? 끊임 없는 의문이 들었다.


몇 번의 아픈 시기를 지난 뒤 생각했다. 내 삶의 방식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어야 하겠구나.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몸도, 마음도 아니구나. 150%, 200% 출력하며 살면 성공하는 삶은 살 수 있을지라도 내 아이에게 큰 피해를 주는 삶, 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돌볼 수 없는 삶을 살겠구나. 그런 삶이 행복하지 않으리란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아이의 삶은 어른의 삶과 다르게 무계획적이고, 가변성이 높다. 하루 하루가 다르다. 그런 아이의 삶에 발 맞춘다는 것은 내 삶의 계획성을 내려놓고, 가변적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것이다. 애초에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지녀야 계획이 흐트러져도 화가 나지 않는다. 어제와 다른 행동으로 아이가 날 당황시켜도 혼란스럽지는 않다.


나의 성실함은 내 육아의 큰 장애물이 되기 시작했다. 매일 꾸준히 하려는 노력 자체가 도리어 내 삶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지금 내 삶은 매우 가변적이어서 그런 꾸준함이 오히려 걸리적 거리는 것이다. 어떤 날은 안할 수도 있고, 어떤 날은 할 수도 있는 이 상황을 나는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내 삶을 이끌어주는 힘은 성실함이 아니라 균형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으로는 성실하되 불성실한 날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목적을 가지고 노력하되 때로는 노력할 수 없는 날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아이와 나, 성실과 불성실, 목적과 자유함. 이 모든 것을 잘 저글링하며 살아가는 것이 유연하고 탄력있는 삶이란 생각이 들었다. 성과를 내는 삶도 소중하지만, 이제 나에게는 실패하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나날을 받아들이는 여유가 더 소중해졌다.


아이로 인해 나는 많은 내려놓음과 실패를 배우고 있다. 예전처럼 머리도 돌아가지 않고,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놀라워 해야 하는 날도 늘어가고 있다. 노력하면 되던 세상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스스로를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런 나의 삶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지만, 많은 몸과 마음의 아픔을 겪으니 이 삶이 주는 깊이에 대해 고맙게 느끼기 시작했다. 삶을 살아갈 때 높이 솟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깊이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도 들었다. 아이로 인해 내 삶은 더 풍성해졌다. 성공과 실패를 모두 넉넉히 받아들이는 품을 늘리고 있다. 이인 삼각 달리기를 하듯 더 불편하고, 더 무거워졌지만, 함께 하기에 더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 성실이 발목을 잡을 때는 성실을 품에 안고 달려야겠다. 지나가는 불성실과도 손을 잡으며. 비록 성실하지 못해도 괜찮다. 성실이란 것은 꼭 몸으로 실천할 수 없는 순간도 많으니까. 마음에 늘 성실함을 품고 있으면, 삶도 내 마음을 이해해줄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