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뾰족 튀어나오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물건을 깨끗이 쓰고 싶어한다. 내 물건도 그럴진대 공용으로 쓰는 물건은 더 조심스럽다. 독서가 취미이다 보니 도서관의 책이 늘 수중에 있는데, 책을 무료로 빌려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되도록 깨끗이 읽으려 노력한다.
2주 전 꽤 어려운 책을 빌렸다. 보통은 도서관 책을 집에서만 보고, 밖에 돌아다닐 때는 전자책에 책을 여러 권 담아 다니는데, 어려운 책인지라 계속 밖에 나갈 때마다 들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책 표지 모서리의 까짐이 급격히 심해지고, 표지도 기스가 많이 난 것 같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책을 다 읽으니 꽤나 좋은 책이었다. 앞으로도 누군가에 의해 계속 대출이 이어졌으면 하는 책인데, 빠르게 헌 상태로 만든 책임이 느껴져서 괜스레 마음이 좀 무거웠다.
특히 나는 희망도서 신청을 즐겨 하는 편이라 책의 상태에 대한 책임감이 느껴질 때가 많다. 희망도서 제도는 도서관에서 새 책을 구입하면 가장 먼저 나에게 대여해주는 제도이기에 그런 책일수록 가급적 깨끗하게 보고 반납하려 노력을 많이 한다.
이제 가방에 도서관 책을 그냥 넣어 다니지 말고, 지퍼백에 잘 넣어서 들고 다녀야겠다 다짐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오늘 희망도서를 받으러 가며 지퍼백을 챙겨 갔다. 희망도서를 받아 지퍼백에 잘 넣고 돌아다니는데, 지인을 만났다. 내 책이 지퍼백에 넣어져 있는 것을 보며, 지인이 책을 비닐에 싸서 다니는 거냐 물어봤다. 짧게 대답하고 그 외의 대화는 하지 않았지만, 지인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긍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내 생각이 무심코 사물에 의해 드러나 다른 이에게 말을 걸 때. 그 순간 때론 당당하기도 하고, 때론 부끄럽기도 하다. 오늘 같은 경우는 다행스럽게도 지인이 긍정적으로 바라봐줘서 부끄럽지 않았다.
가령 드러난 사물에 의해 나의 궁색함이 드러날 때, 귀찮아서 신경 쓰지 않아 위생적이지 않은 모습이 드러날 때, 때론 나의 이기심이 드러날 때. 그럴 때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 진다.
주머니의 송곳은 어떻게든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나의 생각은 자연스레 물건에 흔적을 남기고, 섬세한 누군가는 혹은 섬세하지 않은 누군가라도 드러난 나의 물건에서 나의 자취를 느낀다.
나에게 소유된 사물이 타인에게 말을 걸 때. 되도록 그 말의 분위기가 다정하고 사려 깊었으면 한다. 긍정적이었으면 한다. 그 사물을 보고, 그가 웃음 짓고, 나를 좀 더 정답게 느껴줬으면 좋겠다. 나의 부족함이 귀엽게 느껴질 정도로 심각한 부족함이 아닌 적당한 부족함이면 좋겠다.
오늘 짧게 스쳐간 지인과의 대화 속에서 혼자 있을 때 더 순수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박준 시인은 그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에서 이런 문장을 적었다.
끝부분에 두었던 두어 단락은 고민 끝에 지운다. 다만 어떤 글은 누군가에게 읽히지 않아도 쓰이는 일만으로 저마다의 능력과 힘을 가지는 것이라 믿는다. 마치 마음 속 소원처럼, 혹은 이를 악물고 하는 다짐처럼.
나는 마음 또한 그렇다 생각한다. 때론 어떤 마음은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그저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 저마다의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고. 아무도 없을 때 먹었던 내 마음은 나를 떠나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능력과 힘을 발휘할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하루 하루 내가 먹는 마음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머니의 송곳. 어느 순간 뾰족 튀어 나오는 나의 생각. 송곳이 남을 찌르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물건을 고정시키기 위한 이로운 목적을 지니고 있듯 뾰족 튀어 나오는 나의 생각이 나와 누군가를 이롭게 하길 바란다.
내일은 어떤 송곳이 누군가에게 드러날까. 가끔은 당당하고, 가끔은 부끄러운 그 송곳의 행방이 사뭇 궁금해진다.